연금은 모든 세대를 막론하고 건강하고 활기찬 노후생활을 위한 핵심적인 소득 보장수단 중 하나다. 그중 퇴직연금은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국민연금 다음으로 노후 준비에 중요한 연금으로 꼽힌다. 하지만 현실은 과거의 퇴직금 제도에서 크게 진화하지 못한 채 모두의 무관심 속에 잠들어 있다. 비즈워치는 연금개혁의 사회적 공론화 움직임에 발맞춰 [대한민국 퇴직연금 리포트] 시리즈를 통해 우리나라 퇴직연금 제도의 현주소를 짚어 보고 실질적인 활성화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편집자]
"보수에 비해 수익률이 너무 낮아요. 그래서 노후 대비에 도움이 될 거라고 크게 기대하지 않아요. 회사에서 가입한 확정급여(DB)형 퇴직연금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고 운용하는 회사도 잘 몰라요. 어차피 퇴직금이라 생각하고 퇴직 후에는 한꺼번에 인출할 생각이에요"
대한민국의 이른바 '3층 연금(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 중 하나로 꼽히는 퇴직연금 제도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어느 평범한 40대 직장인의 얘기다.
퇴직연금은 지난 2005년 12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근퇴법) 시행과 더불어 기존의 퇴직금 제도를 대체해 근로자의 퇴직금 수급권을 강화하고 안정적인 노후생활을 도울 목적으로 도입했다. 근로자는 퇴직 시 그간 쌓아온 적립금을 일시금이 아닌 연금 형태로 받으며 노후를 대비하고, 기업(사용자)은 폐업·파산 등으로 퇴직금 지급을 못하는 상황에 대비하자는 게 기본 취지다.
제도 시행 후 18년이 흐른 지금 퇴직연금은 적립금이 300조원을 넘어 400조원을 향할 정도로 그 몸집이 거대해졌다. 하지만 도입 당시 기대와 달리 아직도 '연금'으로서의 활용도에는 물음표가 달린다. 물가상승률과 임금상승률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익률 역시 민망한 수준이다. '빛 좋은 개살구' 퇴직연금의 역할과 기능을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퇴직연금? 솔직히 잘 몰라요"
우리나라 퇴직연금 시장은 외형적으로는 일단 가파른 성장세를 달리고 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2020년 255조원 △2021년 295조원 △2022년 335조9000억원으로 꾸준히 불어나 올 상반기 기준으로는 345조원을 돌파했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은 지난 2월 퇴직연금시장 전망 보고서를 통해 오는 2032년에는 퇴직연금 적립금이 860조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관측했다.
가입률 역시 매년 최고치를 갈아치우는 중이다. 2021년 기준 대상 근로자 1195만7000명 중 53.3%가 퇴직연금에 가입하고 있다. 2015년 48.2%에서 매년 1% 안팎으로 높아지는 추세다. 중소기업 사업장의 도입률을 높이는 게 관건으로 꼽히지만 지난해부터 시행된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제도가 점차 활성화하면 가입자 수는 꾸준히 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성장에 비해 퇴직연금에 대한 인식 수준은 사실상 제자리걸음이다. 자신이 가입한 퇴직연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거나 아예 무관심한 경우도 적잖다. 이는 최근 비즈워치가 '당신은 퇴직연금을 얼마나 알고 있나요?'라는 주제로 20~50대 직장인 23명(20대 5명·30대 7명·40대 7명·50대 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심층면접조사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전체 응답자 23명 가운데 4명(17.4%)은 자신이 가입한 퇴직연금 유형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고 답했다. 또 현재 본인의 퇴직연금 수익률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냐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26%에 달하는 6명이 '모른다'고 했다.
자신의 퇴직연금 수익률에 무관심한 6명 중 5명은 사회생활을 활발히 하면서 노후 준비에도 신경 써야 할 30~40대다.
국내 퇴직연금 확정금액 주는 DB형 쏠림 뚜렷
우리나라 퇴직연금 제도는 통상 크게 DB형, DC형, IRP 세 가지로 나뉜다.
확정급여형이라고 하는 DB(Defined Benefit)형은 말 그대로 근로자가 지급 받을 퇴직급여 수준을 사전에 확정해 근로자와 사용자 간 합의하에 지정한 퇴직연금 사업자에 운용을 맡기는 방식이다. 여기서 퇴직급여는 '퇴직 시점 평균 임금 X 근속연수'로 계산한다. 근로자 입장에선 운용결과와 상관없이 확정한 금액은 보장받을 수 있다.
확정기여형이라고 하는 DC(Defined Contribution)형은 사용자의 부담금을 사전에 확정하고 근로자가 받을 퇴직급여를 적립금 운용 실적에 따라 받는 방식이다. 즉 사용자가 근로자의 개인 계좌에 부담금을 넣어주면 근로자가 사용자와 합의해 지정한 퇴직연금 사업자의 금융상품을 골라 직접 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DB형과 달리 운용 과정에서 손실이 나면 근로자 본인이 감수해야 한다.
2012년 근퇴법 개정으로 도입한 IRP(Individual Retirement Pension)는 '개인형 퇴직연금'이라 부른다. 소득이 있는 개인이라면 직접 가입해 자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형태로, 연간 최대 1800만원 납입, 900만원까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현재 국내 퇴직연금 제도는 DB형에 대한 쏠림 현상이 뚜렷하다. 고용부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전체 퇴직연금 제도 중 DB형 비율은 57.3%로, 확정기여형(25.6%)과 IRP(17.2%·기업형 IRP 포함) 등을 크게 앞선다.
비즈워치의 심층면접조사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퇴직연금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은 편인데다 무엇보다 사용자들이 운용의 무게 추를 안정성에 두고 있는 영향이 크다.
이는 예·적금과 보험, 주가연계파생결합사채(ELB) 등 원리금 보장형과 펀드나 상장지수펀드(ETF), 채권 등과 같은 실적배당형 등 상품 유형별 적립금 비중을 통해 더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작년 말 전체 적립금 335조9000억원 중 원리금 보장형은 298조원(88.7%)으로 실적배당형 37조9000억원(11.3%)을 압도한다.
임금상승률 따라가기도 벅차…퇴직연금 아닌 그냥 퇴직금?
퇴직금을 연금화해 노후생활 자금으로 활용하자는 퇴직연금의 본래 목적을 고려하면 안정적인 성과를 꾸준히 유지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근로자와 사용자의 원리금 보장형 선호 현상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성과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지난 말 기준 퇴직연금의 연간수익률은 0.02%로 겨우 '마이너스(-)'를 면하는 데 그쳤다. 2021년 2.00%와 비교하면 1.98%포인트 떨어진 수치다. 작년 수익률 악화는 시장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실적배당형 수익률이 -14.20% 뒷걸음질 친 탓이 크지만 최근 5년과 10년 연 환산 수익률이 각각 1.51%, 1.93%에 머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장기 성과 역시 초라한 것은 마찬가지다.
퇴직연금에 가입한 근로자들은 적어도 임금상승률 이상의 수익률을 거두길 바란다. 비즈워치의 심층면접조사에서 퇴직연금 목표 수익률(1년)을 묻는 말에 임금상승률을 웃도는 퇴직연금 수익률(1년)을 목표로 한다는 응답자는 5명(21.7%), 5~10%를 목표로 세운 응답자는 12명(52.2%)에 달했다.
대통령직속 일자리위원회가 공개한 작년 명목 임금상승률이 4.6%에 이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체 응답자(23명)의 74%가 임금상승률보단 퇴직연금 운용성과가 나아야 한다고 답한 셈이다. 특히 빠듯한 생활자금 운용 속에 노후 대비까지 신경써야 하는 40대 응답자의 경우 7명 전원(100%)이 같은 목소리를 냈다.
수익률 부진은 퇴직연금에 대한 근로자의 불신을 키우고 관심을 떨어뜨리는 직접적인 요인이다. 이는 가뜩이나 잦은 퇴직연금 중도인출을 더 부채질할 수 있다.
통계청이 작년 말 내놓은 '퇴직연금통계 결과'에 따르면 2021년 퇴직연금 중도인출 인원은 5만5000명, 인출금액은 1조9000억원에 달했다. 2020년 대비 각각 20.9%, 25.9% 줄어든 수치다. 다만 이는 2020년 4월 연간 총급여 12.5% 이상 의료비가 나갈 때만 장기 요양 목적으로 중도인출을 할 수 있도록 인출 요건을 강화한 영향이 커서 근로자들이 자의로 중도인출을 줄였다고 해석하긴 어렵다.
중도인출 사유를 보면 주택구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54.4%, 전세 보증금 마련 같은 주거 임차가 27.2%로 집 문제를 명분 삼아 노후 자금을 먼저 빼 쓰는 근로자의 비율이 80%를 웃돌았다. 높은 집값과 가계부채를 감안하면 중도인출을 원하는 근로자는 여전히 많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은퇴 후 퇴직연금을 연금이 아닌 일시금 형태로 받아 가는 사례도 빈번하다. 중도인출로 인해 막상 퇴직 시 받을 금액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고용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만 55세 이상으로 퇴직연금 수급을 개시한 계좌 45만7468좌 중 92.9%에 해당하는 42만4902좌가 일시금을 선택했고 연금으로 받겠다는 계좌는 3만2566좌(7.1%)에 불과했다. 그나마 △2020년 3.3% △2021년 4.3% 보다 높아진 것이 긍정적이나 수급 개시 금액 중 연금수령 비율은 △2020년 28.4% △2021년 34.3%으로 높아지다 다시 지난해 32.6%로 떨어졌다.
퇴직금을 연금 방식으로 받으면 퇴직금에 대한 퇴직소득세를 30% 할인받을 수 있고 연금 수령 요건을 채운 뒤 11년 차부터는 퇴직소득세의 40%를 깎아준다. 아울러 연금 수령 기간에 퇴직소득세를 나눠 낼 수 있어 과세 이연 효과도 생긴다. 일시금 수령의 경우 퇴직금에 대한 퇴직소득세는 할인 없이 한꺼번에 내야 하고 세액공제 받은 금액과 운용수익은 기타소득세 16.5%를 적용받는다.
이처럼 더 늦게 받을수록, 더 오래 받을수록 세금혜택도 더 크지만 다수의 근로자는 과거의 퇴직금과 다를 바 없이 퇴직연금을 타 가고 있다.
'유명무실' 온라인 교육…정부·회사 적극 나서야
그런 점에서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퇴직연금 교육과 홍보가 더 활발해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이번 비즈워치 심층면접조사를 통해서도 파악이 가능하다.
평소 퇴직연금에 큰 관심이 없는 이유(복수응답 가능)를 묻는 말에 20대(총 5명)에선 '금액이 크지 않아서'라는 답과 더불어 '회사가 알아서 운용해줘서'란 응답을 한 사람이 각각 3명으로 가장 많았다. 30대(총 7명) 역시 '회사가 알아서 운용해줘서'와 '제대로 된 설명이나 교육을 받지 못해서'라고 대답한 사람이 각 3명으로 다수를 차지했고 40대(총 7명)와 50대(총 4명)에서도 '회사가 알아서 운용해줘서'라고 응답한 숫자가 각 5명, 3명으로 가장 많았다.
대부분의 근로자가 퇴직연금에 대해 무관심한 이유로 관련 지식이나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회사가 알아서 운용해주고 있다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퇴직연금은 정부가 일임형태로 알아서 운용하는 국민연금과 달리 근로자나 사용자가 사업자의 도움(자문) 속에 직접 운용 지시를 내리는 자문형 연금이다. 그런 점에서 근로자가 연금을 잘 굴릴 수 있도록 사용자와 정부 및 유관기관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하다.
근로자들 역시 평소 퇴직연금 운용에 대한 정보 공유나 실효성 있는 교육에 목말라 있다. 설문조사에서 퇴직연금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을 묻는 말에 응답한 18명 중 절반에 해당하는 9명이 회사 또는 정부 차원의 교육과 홍보가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답한 것이 그 방증이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제32조에 따르면 퇴직연금제도를 설정한 기업은 매년 1회 이상 가입자(근로자)에게 퇴직연금제도 운영상황 등에 관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10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하지만 대다수 기업의 퇴직연금 교육은 온라인 또는 서면 형태로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다. 설사 대면 교육을 하더라도 추가적인 비용 투입 없이 퇴직연금 사업자에 떠넘기는 사례가 다반사다. 이는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
심층면접조사에 참여한 20대 직장인 A씨는 "퇴직연금이 미래를 대비한 장기 투자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2030세대는 당장 퇴직이 가깝지 않다 보니 관심이 적은 게 사실"이라며 "(사업자들의) 퇴직연금 상품에 대한 홍보에 비해 정작 퇴직연금의 기본 개념이나 운용방법 등에 대한 기초교육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아쉽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