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은 모든 세대를 막론하고 건강하고 활기찬 노후생활을 위한 핵심적인 소득 보장수단 중 하나다. 그중 퇴직연금은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국민연금 다음으로 노후 준비에 중요한 연금으로 꼽힌다. 하지만 현실은 과거의 퇴직금 제도에서 크게 진화하지 못한 채 모두의 무관심 속에 잠들어 있다. 비즈워치는 연금개혁의 사회적 공론화 움직임에 발맞춰 [대한민국 퇴직연금 리포트] 시리즈를 통해 우리나라 퇴직연금 제도의 현주소를 짚어 보고 실질적인 활성화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편집자]
37만8000명.
미국 최대 퇴직연금 자산운용사인 피델리티가 올해 상반기 자사 401(k) 가입자 중 계좌에 100만달러(약 13억4000만원) 이상의 잔액을 가진 가입자를 집계한 숫자다. 401(k)는 미국 대표 퇴직연금 제도로, 이른바 '연금 백만장자'가 수십만명에 달한다는 얘기다. 퇴직연금으로 부자를 꿈꾸기는 커녕 당장 급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중도인출이 잦은 우리나라의 퇴직연금 가입자 입장에선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퇴직연금 시장의 문을 연지 150년을 향해 가는 미국을 필두로 유럽 주요국과 호주 등은 퇴직연금 제도를 일찌감치 정착시켜 자국민의 노후 대비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들과 비교하면 제도 도입 19년 차를 맞은 우리나라의 퇴직연금 제도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퇴직연금 선진국들의 제도적 특성과 현실 적용 사례 등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DC형 중심 미국…주식·TDF 등 고수익상품 적극 투자
미국은 '연금 천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 세계에서 연금제도가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다. 퇴직연금도 예외는 아니다. 19세기 말 도입해 이미 공적연금, 사적연금과 더불어 소득보장제도로서 확고한 위상을 확보했다.
근로기준법에 의해 국가가 주도하는 우리나라 퇴직연금 제도와 달리 미국은 기업이 복지 차원에서 자율적으로 설립해 운영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875년 카드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기업연금을 설립한 것이 시발점이 됐다.
현재 미국 퇴직연금 제도는 크게 사회보장연금(Social Security)과 공적연금(Pension), 일부 사적연금, 그리고 401(k)로 통용되는 확정기여(DC)형 사적연금으로 나뉜다.
미국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퇴직연금을 대부분 확정급여(DB)형으로 운영했다. 그러다 1978년 조세법에 임금 노동자의 연금 납입액을 소득세에서 면제하는 코드 401(k) 조항이 소개된 것을 기점으로 기업의 비용 절감 등이 맞물리면서 1990년대부터 DC형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미국 퇴직연금의 상징과도 같은 401(k)는 미국 내국세입법(IRC)에 따라 민간사업장에서 종업원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DC형 퇴직연금 제도다. 근로자가 운용을 책임을 진다는 점에선 우리나라 DC형과 흡사하지만 가입 여부와 납입 금액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점은 다르다.
미국자산운용협회(ICI)에 따르면 올 1분기 기준 DC형 퇴직연금 적립금은 9조8000억달러(약 1경3004조6000억원)에 이른다. 401(k)를 도입한 1982년 2640억달러(약 350조3300억원)에서 37배 넘게 불어났다. 이 가운데 401(k)가 차지하는 비중은 70.4%(6조9000억달러)에 이른다. 2009년 당시 버락 오바마 정부가 401(k) 자동가입제를 도입하면서 DC형 가입이 급증한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미국 DC형 퇴직연금 성장을 주도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미국 근로자들은 401(k)를 은퇴 후 소득보장수단인 동시에 회사의 필수 복지로 생각한다. 사용자(기업)의 매칭 플랜과 세금 공제 혜택 때문이다. 401(k)는 근로자가 월급에서 일정 비율의 돈을 떼내 퇴직연금에 넣으면 기업이 그 금액의 50%나 100%를 추가로 더 입금해 준다. 이를 매칭 자금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연봉이 3000만원인 근로자가 3%의 비율로 90만원을 납입하면 회사가 90만원을 추가로 넣어주는 식이다. 단 고소득자에 대한 혜택을 제한하기 위해 회사 지원 금액 비율(match rate)은 연봉의 6%로 제한한다. 최근에는 정부가 근로자 지원에 따른 법인세 공제 혜택을 늘리면서 근로자의 근속연수에 따라 매칭 비율을 높이는 '자동인상제도'를 도입하는 기업이 증가하는 추세다.
작년 기준 401(k) 납입액은 연간 2만500달러 이내로 납입액과 수익에 대한 세금공제가 있다. 단, 59.5세 이전에 중도인출하면 공제받은 세금과 더불어 10%에 달하는 벌금도 물어야 한다.
DB형 수익률에도 못 미치는 우리나라 DC형 퇴직연금과 달리 401(k)를 위시한 미국의 DC형 수익률은 양호한 편이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10.1%, 3년간(2018~2020년) 수익률은 9.3%에 달한다. 같은 기간 DB형 수익률 9.2%, 8.6%를 웃돈다.
이 같은 성과 격차는 운용방식의 차이에 기인한다. 미국은 퇴직연금 자산을 주식이나 타깃데이트펀드(TDF) 등 예·적금보다 수익을 많이 낼 수 있는 원리금비보장형 상품에 적극적으로 투자한다. 보험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DC형임에도 원리금보장형(2022년 기준 83.3%) 비중이 지배적인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DC형 퇴직연금은 대부분(2021년 기준 97%) 고수익 상품 투자에 집중돼 있다. 이는 2006년 도입한 적격디폴트옵션(QDIA) 제도가 주효했다.
당시 미국 노동부는 연금보호법(PPA)을 통해 DC형 퇴직연금을 운영하는 사업자에 QDIA에 의한 투자손실에 관한 면책조항을 줬다. 이에 따라 근로자에게 QDIA를 제공하는 DC형 퇴직연금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미국 DC형 퇴직연금에서 QDIA 지정 대상으로 허용한 유형은 △TDF △밸런스펀드(BF) △스테이블밸류펀드(SVF) △매니저 어카운트(MA)다. 우리나라와 달리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에서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제외한 것이다. 미국 근로자들은 특히 투자자들의 생애주기에 맞춰 운용사가 알아서 굴려주는 TDF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2006년 이전 35%에 불과했던 DC형 퇴직연금 내 TDF 투자 비율은 2021년 92%로 수직 상승했다.
지난해 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사적연금 활성화를 목적으로 한 퇴직연금 혁신법안(시큐어액트 2.0·Secure Act 2.0)에 서명하면서 DC형 퇴직연금 몸집은 갈수록 더 커질 전망이다.
이소양 보험연구원 연구원은 "시큐어액트 2.0에 신설된 DC형 퇴직연금의 자동 가입, 사업주의 기여금 자동 증액, 시간제 근로자의 가입 조건 완화 등은 DC형 퇴직연금의 가입자 수와 기여금을 확대시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퇴직연금 공공기관 만든 영국…관리감독도 일원화
'요람에서 무덤까지'란 말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에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국가에서 보호하고 돌본다는 의미의 이 관용어는 영국 자유주의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가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에서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목표를 표현한 구호다. 그만큼 영국은 퇴직연금에 있어서도 '진심'인 국가 중 하나다.
DB형과 DC형을 병행해 운영 중인 영국 퇴직연금 제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꼽자면 'NEST(National Employment Savings Trust·국가퇴직연금신탁)'를 들 수 있다.
NEST는 모든 취업자의 노후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기존 DB·DC형 퇴직연금과는 별개로 설립돼 영국 정부가 보조금과 세제혜택을 지원하는 자동가입형 DC형 제도 운영 공공기관을 말한다. 2012년에 세워진 뒤 2018년부터는 영국의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운영 중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낮은 운용수수료(연간 0.5% 수준)와 양호한 운용성과가 맞물리면서 2015년 200만명 수준이던 NEST 가입자는 지난해 1분기 기준 1110만명으로 불어났다. 영국 퇴직연금 가입자 약 2300만명 중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NEST를 이용하는 셈이다.
같은 기간 NEST의 운용자산은 4억2000만파운드(약 7000억원)에서 241억파운드(약 40조2300억원)로 급증했다. NEST의 성공은 2012년 46.5%였던 영국 근로자의 퇴직연금 가입률이 2021년 79.4%로 높아지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아울러 전통적으로 DB형 중심으로 발전하던 영국 퇴직연금의 무게 추는 DC형으로 기울어졌다.
NEST에 가입한 근로자의 99%는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상품인 RDF를 활용한다. RDF는 30년을 기준으로 4단계(기반 형성·성장·안정화·은퇴 후)에 걸쳐 운용전략이 달라지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TDF와 유사하다. NEST 2021/2022 연간 보고서에 따르면 RDF2040 기준 지난 10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9.2%에 달한다.
영국 퇴직연금 제도가 활성화한 배경에는 관리·감독기관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노동연금부(DWP)가 컨트롤타워를 맡고 연금감독청(TPR)과 금융감독청(FCA)이 관리·감독을 담당하고 있다.
FCA는 우리나라 금융감독원과 비슷한 감독기관이고 TPR은 우리나라에 없는 기관이다. 신탁형 퇴직연금을 규제하고 수탁자 역할과 의무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업무를 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연금제도와 관련한 지배구조 개혁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TPR과 비슷한 형태의 기관 설립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이외에도 연금 가입자의 이익 대변 기구인 독립지배구조위원회 등도 감시자로서 제 몫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연금 강국 떠오른 호주…'슈퍼애뉴에이션 효과' 톡톡
호주는 미국과 더불어 대표적인 퇴직연금 강국 중 하나로 꼽히는 국가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공적연금인 노령연금과 더불어 퇴직연금이 국가 연금제도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미국 못잖게 연금 백만장자도 많다. 호주의 금융감독원 격인 호주건전성감독청(APRA)에 따르면 2021년 말 기준 잔액이 100만호주달러(약 8억5000만원) 이상인 계좌 수는 2만개를 넘어섰다.
1800년대 중반 최초의 퇴직연금 상품을 도입하는 등 연금 역사는 오래된 호주지만 퇴직연금 시대의 문을 본격적으로 연 건 1992년 7월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을 시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슈퍼애뉴에이션은 근로자의 퇴직연금 가입과 사용자(기업)의 기여금 납부를 강제화한 DC형태의 기금형 제도다. 호주 자본시장 발전에 일조했을 뿐 아니라 이 나라 국민의 확실한 은퇴 후 소득보장수단으로 성장했다. 올 2분기 기준 슈퍼애뉴에이션 총 적립금 규모는 3조5414억호주달러(약 3009조7600억원)로 우리나라 퇴직연금 적립금(345조원)은 물론 약 1000조원에 다가선 국민연금보다도 3배 이상 많다.
제도의 근간이 되는 것은 기업이 내는 기여금이다. 현재 기업의 최저 기여 수준은 도입 초기 근로자 연 급여의 3%에서 지난해 10% 선으로 올라섰다. 2025년에는 단계적으로 12%까지 높아진다. 세제혜택의 경우 납입금과 투자수익에 대해 적립단계에는 15%의 단일세율로 과세하고 은퇴 후 연금 지급 단계에선 세금을 물지 않는다.
슈퍼애뉴에이션은 월 450호주달러 이하 소득을 얻는 근로자와 18세 미만 비정규 근로자, 65세 이상 근로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의무가입대상이다. 가입자는 기업형기금과 산업형기금, 공적기금, 소매형기금, 자기관리기금 등 5가지 기금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 가능하고 기금에 따라 근로자의 배우자도 가입할 수 있다.
슈퍼애뉴에이션 내 기금의 형태는 대형 기금 중심으로 운영하며 영리법인인 금융회사를 수탁자(소매형기금)에 포함하는 등 다양한 기금을 근로자 선호에 따라 고를 수 있게 해 가입자 선택의 폭을 넓히고 기금 간 경쟁을 유도한다. 이에 자연스럽게 '규모의 경제'가 작용하면서 기금 규모가 큰 산업형기금과 공적기금은 2021년 기준 5년과 10년 수익률이 8~9%로 양호한 성과를 내고 있다.
슈퍼애뉴에이션이 성장에 가속도를 붙이게 된 것은 2013년 6월 새로운 디폴트옵션을 제공하는 상품인 '마이슈퍼(MySuper)'를 도입하면서다. 마이슈퍼의 성공은 이제 막 디폴트옵션을 접한 우리나라가 주목할 대목이다.
마이슈퍼에선 하나의 기금에 오직 하나의 디폴트옵션만 설정할 수 있다. 디폴트 상품의 경우 단일 분산투자 전략을 추구하는 밸런스드 펀드와 생애주기에 따라 자산을 배분하고 은퇴 시점이 다가오면 보수적인 자산배분을 꾀하는 라이프스타일 펀드로 단순화돼 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디폴트옵션에서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빼 고수익 상품으로의 투자를 유도한 점이 눈에 띈다.
아울러 호주 퇴직연금 당국은 가입자에게 부과하는 수수료를 표준화하고 감독기관인 APRA 홈페이지를 통한 디폴트 상품의 공시 기능을 강화했다. 공시 정보에는 투자전략과 수익률, 위험지수, 수수료 등을 포함한다. APRA는 기금 간 경쟁을 통한 성과 개선을 꾀할 목적으로 매년 일정 수준 이하 수익률을 내는 수탁법인을 공개하고 2021년부터는 성과가 가장 나쁜 곳을 퇴출하는 제도도 도입했다.
그 결과 호주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적극적으로 주식과 채권 등에 투자하고 있다. 2021년 슈퍼애뉴에이션 적립금의 70% 이상이 주식, 채권 등 금융자산에 투자된 것으로 나타났다. 자산배분 역시 해외주식 28%, 호주주식 23%, 호주채권 10%, 해외채권 8% 등으로 다양하다. 슈퍼애뉴에이션 가입자의 디폴트옵션 가입률은 80%에 이른다.
김병덕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투자전략과 수수료를 단순화한 저비용 구조의 마이슈퍼 시행으로 가입자들은 퇴직연금 투자상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동시에 상품 간 비교가 쉬워졌다"며 "또 각 기금 간 경쟁을 통해 수수료를 낮추고 수익률을 높이도록 유도했다"고 평가했다.
일본, 제도 정착·디폴트옵션 '글쎄'…반면교사 삼아야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일본이지만 적어도 퇴직연금에서만큼은 명함을 제대로 내밀긴 민망한 수준이다. 퇴직연금 제도 자체를 받아들인지는 꽤 오래됐지만 성공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퇴직일시금 제도가 퇴직연금 제도로 발전한 국가이자 고도 경제성장기에서 저성장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퇴직연금 개혁에 나섰다는 점에서 우리나라가 반면교사할 필요가 있다.
일본 퇴직연금 제도는 1960년대에 도입한 후생연금기금(EPF)와 세제적격 퇴직연금제도(TPP), 2000년 초부터 시행한 확정급부기업연금(DBP), 확정갹출연금(DCP) 등으로 구분한다. 이중 TPP는 2012년에 이미 폐지됐고 EPF는 2014년부터 신규 가입이 금지돼 올해 완전히 사라진다.
지배구조는 크게 기금형과 규약형으로 나뉘는데 DBP는 노사 합의에 따라 기업이 기금형과 규약형 중 선택할 수 있고 우리나라 DC형과 같은 DCP는 규약형으로 운영한다.
기금형은 한국의 DB형으로 운영하는 300인 이상 대기업이 대상이다. 집행기관으로 기금위원회를 두고 위탁관리·운용은 은행과 보험사, 증권사 등 금융회사가 맡는다. 규약형은 기업이 금융회사가 계약을 맺고 수탁 금융회사가 연금자산을 관리·운용하는 구조다.
일본 기업들의 퇴직연금 제도 도입 비중은 우리나라와 비교해도 낮은 편이다. 일본 인사원이 2020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근로자 50인 이상 일본 기업의 퇴직급여제도 도입률은 91.9%이나 이 중 퇴직연금제도를 시행 중인 기업은 45.8%에 불과하다. 반면 복수응답 기준으로 퇴직금 제도를 운영하는 기업은 91.2%에 달한다. 연금으로 쓸 재원을 사내유보하면서 운영자금으로 활용하려는 기업이 많아서다.
일본 전체 퇴직연금 가입자 수 역시 2000년 2100만명을 정점으로 신규 취업인구 감소와 베이비부머 은퇴 여파로 2020년 1692만명으로 되레 후퇴했다. 퇴직연금 적립금 역시 같은 해 기준 98조8000억엔(약 895조2600억원)으로 경제 규모에 비해 초라한 실정이다. 이는 거품경제 붕괴 이후 자산운용 실패로 인한 EPF의 부실화와 더불어 EPF의 위탁운용사였던 AIJ투자자문의 퇴직연금기금 사기 사건 후폭풍이 컸다.
지난 2012년 일본증권거래감시위원회는 AIJ가 운용 중인 기업연금 90%가 손실 상태라고 밝혔다. 조사 결과 AIJ는 연금 운용에서 거액의 손실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최대 240%에 달하는 수익률을 내고 있다고 속이고 연금을 끌어모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로 인해 EPF 연기금 84곳과 88만명에 이르는 가입자가 맡긴 연금자산 1458억엔 중 1377억엔이 허공으로 사라졌고 퇴직연금기금들이 연쇄파산하면서 은퇴자금을 맡긴 가입자들 역시 노후파산에 시달려야 했다.
AIJ 사건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구성원과 이해관계자들의 도덕적 해이와 주의 부족, 업무 태만 등이 문제였다. 이는 기금형 퇴직연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확산과 더불어 일본 퇴직연금 제도 전반에 대한 신뢰도 추락을 불러왔다. 한편으로는 신탁제도가 일찌감치 발달한 미국·유럽 등과 달리 신탁문화가 정착하지 못한 일본 금융감독시스템의 민낯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최근 국내 퇴직연금 시장의 최대 화두 중 하나인 디폴트옵션의 참고 사례로 자주 언급되기도 한다. 기업의 실제 도입률이 낮고 성과 개선이 뚜렷하지 않은 탓이다. 여기에 일본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나라와 함께 디폴트옵션 상품에 원리금보장형을 포함한 유이한 국가라는 점에서 더 큰 관심을 모은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2016년 DC형 확정기여연금법을 개정하고 2018년 5월 자국판 디폴트옵션 제도인 '지정운용방법'을 본격 시행했다. 퇴직연금에 무관심한 계층이 늘고 원리금보장형 상품 선호가 심화하자 우리나라를 비롯한 디폴트옵션 도입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실적배당형 상품 투자 확대를 유도해 투자 수익률을 높이려고 한 것이다.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2021년 지정운용방법 제도하에 기업이 디폴트상품으로 설정한 실적배당형 상품 비율은 20% 이상으로 도입 전(2016년) 4.1%와 비교해 높아졌다. 얼핏 일본 정부가 디폴트옵션 도입 목적을 일정 부분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들의 도입률은 여전히 답보 상태다. 2018년 이후 일본 기업들의 지정운용방법 제도 도입률은 30~40% 수준으로 새 제도 도입 전(2016년) 기업들의 디폴트상품 제도 도입률 64.9%에 크게 못 미친다.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제도를 다듬고 있는 상황이라 아직 디폴트옵션 성패를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일본의 디폴트옵션 제도를 일부 벤치마킹한 우리나라 입장에선 현 상황을 차분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