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시장 선진화를 주요 정책과제로 추진해온 금융위원회가 'ESG공시(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 정책 수립 과정에서 당초 계획보다 크게 후퇴한 방안으로 결론을 내고 논의를 진행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위는 그동안 여러차례 미뤘던 공시 의무화 시점을 2029년으로 확정하고, 공시대상도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의 코스피 상장사에서 20조원 이상 상장사로 크게 완화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또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ESG공시를 법정공시로 할 예정이었으나, 한국거래소 규정에 따른 공시로 추진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내용은 기업부담을 낮춘다는 명분은 있지만 사실상 금융당국이 추진 중이던 자본시장 선진화와 배치되는 결과인 만큼 논란이 예상된다. ESG공시, 시점·대상·형식 모두 후퇴시킨 금융위
금융위원회는 지난 23일 보도자료를 통해 ESG금융추진단 제5차 회의 내용을 공개했다. 추진단은 해외 ESG공시 사례를 근거로 국내 ESG공시 도입 시기를 심도 있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애초 금융위는 2021년초 발표한 ESG공시 단계적 의무화 계획을 통해 2025년부터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대상으로 공시를 시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다 시행시점이 임박한 2023년 10월에는 다시 '2026년 이후'로 연기했다. 지금까지도 구체적 시행시점을 확정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지난 23일 추진단 논의내용을 종합하면 더 뒤로 늦출 수도 있다는 해석이 가능했다.
이러한 해석은 사실로 드러났다. 금융위가 '2029년 시행'을 염두에 두고 ESG공시 로드맵을 논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경영계에서 주장해 온 ESG공시 2029년 시행안을 그대로 반영한 셈이다.
관련 내용에 정통한 국회의 한 관계자는 "금융위가 사실상 2029년 시행을 못 박고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 안다"며 "공시대상 역시 기존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에서 자산총액 20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로 대폭 축소했다"고 설명했다.
시행시점 못지 않게 ESG공시대상이 축소된 것도 문제다. 애초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대상으로 단계적으로 ESG공시 의무화를 추진할 예정이던 금융위가 20조원 이상으로 기준을 대폭 낮췄다. 지난해 말 기준 자산총액 20조원 이상인 상장사는 △삼성전자 △삼성생명 △한국전력 △한화생명 △기업은행 등 42곳에 불과하다. 해당 관계자에 따르면 2029년 시행 및 자산총액 20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대상으로 ESG공시를 시행한다는 안은 금융위가 먼저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금융위는 ESG공시를 자본시장법상 법정 공시가 아닌 한국거래소 자율공시로 추진하기로 가닥 잡았다. 또 공급망 전체를 온실가스 배출 감축 대상으로 삼는 방식인 스코프(Scope)3도 2031년 추진하는 것으로 계획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역시 기업의 부담을 낮춘 조치다.
2029년 시행·자산총액 20조원, 공개 안 한 이유는
금융위는 △2029년 시행 △자산총액 20조원 이상 대상 등의 내용을 잠정 확정한 상황에서 23일 ESG금융추진단 회의내용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아울러 5월 중 공청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한 뒤 6월 3일 대통령선거 이전에 ESG로드맵 확정안을 발표할 계획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금융위는 23일 발표한 보도자료에 해당 내용을 넣지 않았다. 대신 유럽연합(EU)과 일본, 영국·미국·캐나다 등을 예로 들며 해외 주요국들이 ESG공시를 아직 확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국내 ESG공시 역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는 정도로만 내용을 정리했다. 아울러 금융위는 '2029년 시행'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해석 가능하도록 EU의 역외기업에 대한 ESG공시 의무화 시점을 예로 들었다.
일각에서는 금융위가 차기 대선 후보로 유력한 야당 경선캠프의 눈치를 보고 △2029년 시행 △자산총액 20조원 이상 등 구체적인 내용을 비공개로 돌린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금융위의 ESG공시 로드맵 계획이 새나갔고 야당 쪽 대선경선후보 캠프에서 공개하지 말라고 압박하면서 금융위가 23일 보도자료에 해당 내용을 넣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야당 대선경선 캠프에서 금융위에 압박을 가한 것은 해당 내용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자본시장 선진화 정책과 배치되는 내용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금융위는 해당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2029년 시행, 자산총액 20조원 이상 상장사를 대상으로 결정짓고 논의를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여러 방안을 놓고 다양하게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정을 하더라도 금융위가 일방적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해관계자들 의견을 듣고 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금융위는 야당 대선경선후보 쪽의 압박에 의해 추진단 회의 내용을 수정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선을 그었다. 금융위 관계자는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이미 추진단 보도자료는 내용이 지난주부터 정해져 있었는데 보도계획을 바꾼 것이 없다"고 답했다.
결과적으로 금융위는 올해 상반기 중 내놓겠다던 ESG공시 로드맵 공개를 연기할 것으로 보인다. 해외 사례를 근거로 국내 ESG공시 시행 역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금융위는 올해초 발표한 2025년 업무계획에서 '국제 규범에 부합하는 지속가능(ESG) 공시기준 및 로드맵'을 상반기에 마련하겠다고 밝혔는데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