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척의 전함으로 왜선 133척을 물리친 명량해전을 그린 영화가 요즘 화제다. 절대 열등한 전력으로 용감하게 싸워 이긴 전투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정작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전쟁의 기본인 병사들이 먹고, 입는 병참의 문제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무엇을 먹으며 전쟁을 했을까?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조정으로부터 군량미를 받지 못했다. 알아서 먹고 싸우라는 것이다. 식량을 보급 받을 형편도 못됐다. 명량해전 당시 6년째 전쟁터로 변한 조선 땅에서 나오는 제한된 농산물을 백성은 물론 조선군과 명나라 군, 심지어 적군인 왜군까지도 먹었다. 왜군은 개전 초기를 제외하고는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했다. 조선 땅에서 약탈한 농산물로 군량을 삼았다. 지원군인 명군 역시 중국에서 군량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양식을 조달했다.
이런 사정이니 조선군은 제대로 보급도 받지 못했다. 그나마 내륙인 육지에서 싸우는 부대는 군량미를 받았다. 하지만 수군은 아예 지원조차 받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부족한 군량을 조선군과 명군이 나누어 먹었으니 수군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제해권을 장악, 서남해의 섬과 호남평야에서 농사지을 여유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조선은 군대가 직접 농사를 지어 양식을 확보하는 둔전제가 기본이기도 했다.
식량을 직접 조달해야 했기에 난중일기에는 충무공이 백성과 병사가 먹을 양식을 구하기 위해 고심하는 장면이 곳곳에 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충분한 식량 확보를 위해 왜적이 침범하지 못한 호남평야와 섬을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덕분에 피란민을 결집하고, 군량도 확보하며 곡창지대를 적에게 내주지 않는 1석3조의 효과를 거뒀다.
당시 조선 수군이 먹는 곡식은 100가마가 넘었기에 전시에 둔전에서 지은 농사만으로는 식량을 다 조달할 수 없었다. 때문에 양식이 턱 없이 모자랐는데 이런 경우 소금을 생산해 팔아서 곡식을 조달했다. 난중일기에는 소금 생산을 위해 가마솥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보이는데 조선 중기에는 소금 값이 비쌌기 때문에 상당량의 곡식을 사들일 수 있었다.
또 다른 양식은 청어였다. 전투가 없을 때는 어부처럼 청어를 잡아먹고 말려서 보관했다가 지금의 과메기처럼 먹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청어는 무척 흔한 생선이었다.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청어 기름으로 등잔불을 밝힐 정도였다. 조선 수군은 전쟁 중에 청어를 잡아 군량으로 삼고 또 청어를 팔아 곡식을 마련하기도 했는데 그 양이 만만치 않았다.
1592년 11월 21일자 일기에는 청어 1만 3240 두름을 곡식과 바꾸려고 가져갔다고 나오고, 같은 해 12월 4일자 일기에는 청어 7000 두름을 곡식 사러가는 배에 실었다고 나온다. 한 두름은 청어 20마리를 새끼줄로 엮은 것이니 이틀에 걸쳐 가져 간 청어가 각각 26만 4800마리와 14만 마리다.
이순신 장군의 이런 전시 경영 덕분에 조선 수군은 든든하게 먹고 싸울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군대도 먹어야 진군한다(An army marches on its stomach)"고 했는데 강한 군대는 잘 먹어야 잘 싸운다(足兵足食)는 기본원칙을 이순신 장군은 군량미 확보에서도 실천했다. 이순신 장군이 명장을 뛰어 넘는 훌륭한 리더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