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와 통화량을 조절하여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균형점을 찾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제규모가 확대되고 산업구조가 복잡해질수록 금융이 실물부분에 미치는 경로와 효과가 다양하게 얽히고 설키기 때문이다.
금융완화에서 금융긴축으로 전환하거나 그 반대일 경우에도 효과와 함께 부작용을 동시에 헤아려야 한다. 금융자산이 늘어나는 동시에 금융부채도 늘어난다. 통화정책 변동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한다. 현금성자산을 많이 쌓아두고 있는 대기업은 금리인하를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부채가 많은 가계나 중소기업들은 금리인하를 목매어 기다린다.
통화관리가 더욱 어려워진 것은 과거와 달리 돈이 도는 속도 즉 화폐유통속도가 크게 떨어지고 실물부문과 금융부문이 따로 따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를 간과했다가는 실물과 금융의 괴리가 커져 경제를 뒤엉키게 할 우려가 있다. 그 까닭을 보자.
첫째,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생산요소 가운데 기술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자본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과거 산업사회에서는 대규모 시설과 장비를 동원하는 규모의 경제를 통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하였으나 지금은 조그만 창고에서 작은 자본을 가지고도, 천문학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금 세계적 거대기업들이 창업 당시 단돈 몇 천 달러로 출발한 경우가 많다.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기업경영에 있어서 자본보다는 아이디어나 기술이 더 큰 몫을 차지하는 시대가 되었다.
둘째, 유동성 완화에도 불구하고 물가가 오르지 않는 모습이 오래도록 계속되고 있다. 과거에는 유동성 팽창이 일시적으로 금리를 내리게 하지만, 많이 풀린 돈이 물가를 압박하여 금리가 종전보다 더 상승하는 경우가 많았다. 금리가 실물경제 활동보다는 화폐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는 현상을 설명하는 소위 깁슨의 역설(Gibson's paradox)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돈을 많이 풀어도 물가가 안정되는 까닭은 세계적 공급과잉 현상이 깊어진데다, 역내·외간에 생산물 이동이 직거래로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독과점에 따른 고가정책 횡포도 개방화가 진행되면서 더 어려워지고 있다.
셋째, 실물경제 상황과 관계없이 외국인 포트폴리오 투자(FPI) 자금이 빈번하게 유·출입되면서 금융시장 나아가 실물시장까지 흔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단기적으로는 기초경제여건(fundamental) 변화보다는 외국인들의 투자전략에 따라 주식시장 내지 외환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금융부분이 경제성장, 물가, 고용, 국제수지 같은 거시경제 상황을 충실히 반영하지 못하게 되면, 실물과 금융의 괴리로 말미암은 차익거래 기회를 그들에게 제공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은 정책오류에 따르는 실물과 금융의 괴리를 틈타 초과이익을 노리는 금융약탈자들이 24시간 내내 지구촌 곳곳을 헤집고 다니고 있다.
이와 같이 금융과 실물이 따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과거와 같이 물가 안정만을 목표로 삼는 통화관리는 오히려 경제순환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거의 무제한으로 돈을 풀고도 또 다시 고민하는 선진국 중앙은행들의 모습을 보자. 그들이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인가?
사실 그들은 지옥문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보다도 더 깊이 고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두려워하고 때로는 결단력 있게 행동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변화하는 실물시장과 금융부분이 그에 미치는 다양한 경로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중앙은행이 우왕좌왕하거나, 뒷짐 지고 있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되는 경우를 수없이 경험했다. 불과 한달도 안됐지만, 대내외 경제여건이 순간순간 숨 가쁘게 변해가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기준금리가 무려 14개월 동안 미동도 없었다.
통화를 발행하고 관리하는 일은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집고 서서`있는 자세여야 한다. 또한 `한산섬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