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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과 엮인 LG카드, 그리고 현대차그룹

  • 2014.09.25(목) 14:23

◯…2003년 4월 3일, 금융감독당국이 부랴부랴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내봤다. 신용카드사들이 채권을 상환하지 못할 처지에 놓이자, 당국이 강제적으로 만기를 6월까지 연장하도록 한 ‘카드채 대책’이다. 전년인 2002년부터 서서히 끓기 시작한 카드 문제가 냄비 뚜껑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한 달 뒤인 5월 2일, 시장 대책을 일부 보완해 다시 발표한 자료를 보면 당시(4월 3일~25일) 카드사들은 만기도래금액 5조 6000억 원 중 3조 1000억 원을 연장받았다. 1조 2000억 원을 상환하고, 1조 3000억 원을 새로 빌렸다. 사정이 조금 나은 회사들은 자산유동화증권(ABS 8000억 원), 회사채(1000억 원)를 발행했지만, 그렇지 못한 회사는 기업어음(CP)과 단기 차입금으로 연명하는 상태에 들어갔다.

당국의 금융시장 조치는 시스템 붕괴 우려가 있을 때 나온다. 카드채를 중심으로 채권시장의 붕괴 우려가 커지자 당국이 개입하면서 시장을 일시 정지시킨 것이다. 돈을 받아야 할 사람 입장에선 불만이 있지만, 금융시장에서 계속 장사하려면 당국의 오더를 거부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부 연•기금과 금융회사들이 6월까지 야금야금 받아간 돈으로 만기연장 비율은 예상을 밑돌았다.

그래도 이때까진 대충 버텼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시스템을 일시 정지시킨 기간 시장 신뢰를 회복할 조치를 마련해야 할 카드사들이 숙제를 제대로 했는지 시장으로부터 검사를 받아야 한다. 흔히 말하는 자기자본 확충 계획이다. 당국은 5월 중으로 이를 확정해 발표하도록 했다. 이 숙제를 제대로 못 한 회사는 문 닫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해 11월 21일, LG카드(현 신한카드)가 현금서비스를 중단한다. 내줄 현찰이 없었다. 부도 위기다. 금융시장의 숙제를 하지 않았다는 결과 통보는 이렇게 나타났다. 나흘 뒤 당국이 다시 나서 채권단과의 정상화 방안을 이끌어냈다. 숙제를 다시 하는 조건으로 말미를 준 것이다. 그러나 LG카드는 2004년 1월 채권단 공동 지배를 거쳐 결국 신한금융그룹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금융시장은 무섭다.

이 과정에서 관심을 끄는 것이 LG와 삼성의 악연이다. 당시 삼성투신은 LG카드채를 많이 들고 있었다. 별도의 펀드를 운용할 정도였다. 익스포저가 컸다. 4.3 카드 대책 때 삼성투신은 비교적 정부의 방침을 잘 따랐다. 그러나 이후는 달랐다. LG카드채를 많이 가진 삼성투신이 자금 회수에 나서자 LG카드는 더 버틸 수 없었다. 삼성이 LG를 잡았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았다.

▲ LG카드는 2003년 11월 21일 교보생명에서 돌아온 3000억 원 대의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부도위기를 맞았다. 교보생명은 당국의 압박에 어음을 다시 회수해 위기를 넘겼다.
▲ 2004년 1월 9일 LG카드 채권단이 LG카드에 3조 6500억 원의 유동성을 지원한 뒤 출자로 전환하는 데 합의했다. 이로써 LG카드는 채권단으로 넘어갔다.

◯…2014년 9월 18일, 현대자동차그룹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전 부지 가격으로 10조 5500억 원을 써내 따냈다. 5조 원이 넘으면 ‘승자의 저주’라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에서 2배가 훨씬 넘는 금액으로 삼성과의 경쟁에서 승리했다. 금융시장의 충격은 컸다. 이번 입찰 금액을 메워야 할 계열사들의 주가는 당일에만 10% 가까이 떨어졌다. 이날 날아간 시가총액만 8조 4000억 원이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입찰 금액 결정과 관련해 다양한 분석이 나오지만, 어느 것 하나 설득력은 높지 않다. 이번 투자분에 대한 이연법인세 효과 정도가 그나마 규모 면에서 가장 큰 것으로 추정한다. 기업소득환류세(사내유보금세) 문제도 있지만, 크지 않은 규모다. 어쨌든 세금으로 뺏겨야(?) 할 돈이라면, 사고 싶은 땅을 확실히 사고 세금을 아끼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작용했을 법하다.

대신 정부로부터는 귀여움(?)을 독차지할 수 있다. 정부의 골칫덩이 한전의 부채를 해결하는 데 일조했다. 최소한 4조~5조 원의 부채를 더 줄이는 데 현대차그룹은 일등공신이다. 재벌이 국내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비난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현대차그룹은 이번 입찰 경쟁의 손익계산서상 남는 장사를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에게만 그렇다. 10조 5500억 원이라는 상상을 초월한 낙찰금액에 놀란 투자자들이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기민하게 대응한 그룹 홍보팀의 모습이 이를 방증한다. 이날 그룹 홍보팀의 전략은 ‘애국’이었다. 호사가들은 이날 빛난 것은 그룹 홍보팀뿐이었다고 말한다.

최근엔 소위 ‘찌라시’에 삼성이 9조 원이 넘는 금액을 썼다는 설이 나왔다. 믿거나 말거나, 많은 사람은 현대차그룹이 ‘애국, 구국의 결단’이라는 컨셉으로도 금융시장의 부정적인 시각이 수그러들지 않자 역공작(?)을 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자 삼성은 이 금액을 부인하면서 ‘자신들이 써낸 입찰 금액은 4조 6700억 원이었다’고 고해성사를 했다.☞한겨레, ‘삼성전자, 한전 부지 입찰액은 4조 6700억’

▲ 한전 부지 입찰 전날까지도 5조 원대로 예상했던 입찰 가격.

한전 부지 입찰 결과 발표가 있던 날 현대차는 사내 하청 문제와 관련한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우리나라 대기업에 만연한 비정규직 문제다. 소위 임금 덜 주고 이룬 대기업의 성과라는 비아냥을 들어온 사안이다. 현대차그룹은 절대 무리한 투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주식 투자자들은 10조 원 가까이 잃었다. 총수들은 ‘남는 장사’를 한 듯하지만, 투자자들과 비정규직 직원들의 돈으로 이윤을 남기고 생색을 낸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거액의 투자금액이 현대차그룹의 재무상황에 미칠 영향은 실제로 크지 않다. S&P와 무디스, 그리고 국내 신용평가사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골드만삭스 등 투자회사들은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의 투자전망을 낮추고 있다. 삼성전자 등 국내 대기업의 투자전망도 일제히 나빠지고 있어, 오롯이 한전 부지 낙찰 금액 때문이라고 할 순 없지만, 금융•주식시장 투자자들이 등을 돌릴 명분을 제공한 것은 분명하다.

찜찜한 것은 더 있다. 10여 년 전, LG카드와 삼성의 악연이다. 삼성투신이 부당하게 자금을 회수한 것도 아니고, 채권자로서 회수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삼성과 엮인 LG카드는 무너졌다. 이를 계기로 LG그룹은 계열 금융회사를 모두 포기했다.

삼성과 현대차그룹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이지만, 이번만큼 제대로 맞짱을 떠본 적도 거의 없다. 현대차그룹은 그렇게 삼성과 엮였다. 현대차그룹은 승리했다. 그리고 금융시장은 싸늘하다. 그때 그 시절 LG카드와 LG그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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