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종종 '일본 제품이 아닌 카메라는 없느냐'는 질문이 올라온다. 그만큼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이 아닌 카메라를 찾기 어려운 현실이다.
일본 경제신문 니혼게이자이가 분석한 2018년 상반기 카메라 브랜드별 전 세계 시장 점유율은 ▲캐논(40.5%) ▲니콘(19.1%) ▲소니(17.7%) ▲후지필름(5.1%) ▲올림푸스(2.8%) 순이다. 상위 5개 브랜드 모두 일본 기업이다.
아베신조 정부의 한국 무역보복 조치 이후 카메라제품에 대한 일본불매운동도 거세다. 하지만 카메라 시장에서 일본의 우위가 워낙 압도적인만큼 대체품을 찾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본 카메라 브랜드 중에서도 3대 전범기업(미쓰비시·미쓰이·스미토모)과 관련 있는 곳은 니콘과 후지필름이다.
#미쓰비시 투자로 탄생한 니콘
니콘(Nikon)의 전신은 '일본광학공업주식회사'다.
일본광학공업은 1917년 도쿄계기제작소의 광학부문과 이와키유리제조소의 반사경 부문을 통합해 세워졌는데 이 때 자본출자를 한 사람이 바로 미쓰비시의 4대 사장인 이와사키 코야타(岩崎小彌太)다.
'일본재벌과 그 해체-1951년 지주회사정리위원회'가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미쓰비시가 일본광학공업에 투자한 지분은 전체 주식수의 22.2%에 달한다.
이와사키 코야타는 미쓰비시 그룹의 전범행위에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재벌총수이기도 하다.
코야타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 미쓰비시 4대 사장으로 취임, 1945년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때까지 약 30년 동안 미쓰비시그룹의 전체 사업을 총괄한다. 일본 군국주의가 극에 달하고 미쓰비시가 조선인을 적극적으로 강제동원했던 시기에 그룹을 지휘했던 사람이 바로 코야타다.
2012년 이명수 당시 자유선진당 의원실이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로부터 자료를 받아 발표한 299개 전범기업 명단에 니콘의 이름은 없다.
니콘이 직접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전력이 공식 확인된 것이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전범행위에 적극 가담한 당시 미쓰비시그룹 총수 이와사키 코야타가 상당한 지분을 투자해 설립한 회사가 니콘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니콘은 일본 군국주의가 극에 달하던 태평양전쟁 시기 급속도로 성장했다. 도쿄의 사립대 중 하나인 센슈대학(専修大学)에서 공개한 '니콘의 행보-광학 기기 산업에서 정밀 기기 산업의 전개' 보고서에 따르면 니콘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1937년부터 민간 판매를 축소하고 군수산업 위주로 광학무기를 증산했다.
당시 니콘은 토즈카 공장, 카와사키 공장, 시오지리 공장, 오미야 유리 공장 등 대규모의 공장을 건설했다. 당시 군국주의 정부의 명령에 따라 군수산업을 늘릴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성도 있겠지만 이것이 니콘의 비약적 발전의 밑바탕이 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카메라기술이 발달한 일본과 독일은 전범국가라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전쟁을 위해 망원경 등의 개발이 불가피했고 이것이 광학기술의 발달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전범기업 계승한 후지필름
필름으로 유명한 후지필름(富士フイルム)은 1934년 설립됐다.
후지필름은 당시 대일본셀룰로이드(大日本セルロイド)라는 셀룰로이드 전문기업에서 필름사업부문을 떼어내 만들어졌다. 대일본셀룰로이드는 1908년 미쓰이그룹 계열 사카이 셀룰로이드와 미쓰비시, 이와이상점, 스즈키상점의 출자로 설립된 곳이며, 현재는 유명 화학회사 다이셀(Dicel, ダイセル)로 불린다.
대일본셀룰로이드(현 다이셀)는 강제동원 전력으로 299개 전범기업 목록에 올라간 곳이다. 2012년 전범기업 명단을 발표한 이명수 의원실에 따르면 당시 대일본셀룰로이드는 일본에 작업장 2곳을 두고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이러한 사실은 강제동원 노무자 기록 중 하나인 '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 결과'에서 밝혀졌다.
후지필름 자체는 전범기업 명단에 없지만 기업의 출발이 전범기업 대일본셀룰로이드에서 출발한 만큼 전범기업과 연관성이 있다.
아울러 대일본셀룰로이드의 필름사업부문을 계승한 후지필름은 대일본셀룰로이드에서 분사한 이후 꾸준히 사업관계를 유지했다. 후지필름의 사진필름 제품을 대일본셀룰로이드가 제조해 납품하는 식이다. 태평양전쟁 이후에도 후지필름은 대일본셀룰로이드와 협력해 불에 타지 않는 필름을 개발하면서 기술적 협력을 이어갔다.
후지필름이 직접 군수용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1940년 광학유리용해공장을 건설해 민간용 카메라제품 생산을 중단하고 군용광학기기를 제조했다. 일본 육·해군의 요청에 따라 항공사진용렌즈, 특수사진기 등의 제품을 만들었다.
현재 후지필름은 미쓰비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강제동원 작업장을 운영한 미쓰이계로 분류된다. 후지필름이 미쓰이클럽의 30개 회원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미쓰이클럽은 재벌해체 전 미쓰이 가문이 사용하던 장소를 보존, 회원에 한해 사교모임과 결혼식을 지원하고 있다.
또 후지필름의 지주회사 후지필름홀딩스는 미쓰이그룹의 사장단 모임 니모쿠카이(二木会) 회원사 중 하나다. 니모쿠카이는 전후 해체된 미쓰이 그룹을 다시 결속하는 역할을 한 곳이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