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디스커버리, 라임, 옵티머스 등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사모펀드들이 줄줄이 환매를 중단하며 증권가는 발칵 뒤집어졌다. 제대로 상품 구조를 살펴보지 않거나 고객들에게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고 상품을 팔아치운 증권사들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투자자들의 손해를 배상해주는 것은 물론 금융당국의 조사 끝에 많게는 수십억원의 과태료를 지불해야 했다. 최고경영자(CEO)들은 중징계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증권가에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신한투자증권에서는 상장지수펀드(ETF) 유동성공급자(LP) 운영 중 선물매매로 1300억원에 달하는 손실이 발생했다. 결국 김상태 사장을 자리를 떠나야했으며 연루 직원 2명은 재판으로 넘겨졌다. 한국투자증권은 6조원에 달하는 회계오류가 발견돼 회계심사를 받게 됐으며, 키움증권은 연이틀 트레이딩시스템에서 전산장애가 발생해 '리테일 명가'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었다.
이 가운데 책무구조도 도입은 금융투자업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KB부동산신탁, 하나은행, 회계법인 등에서 내부통제 전문가로 활약해온 김선호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금융산업부문 파트너 회계사는 비즈워치와의 인터뷰에서 '증권사 임원들이 갖고 있는 내부통제에 관한 인식을 바꿔줄 기회'라고 밝혔다.

7월부터 대형 금투사 적용…달라진 분위기 감지
책무구조도는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라고 불리운다. 임원 한 명 한 명이 각자 담당한 업무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 골자다. 담당 임원이 제대로 감독하지 않아 사고가 발생하면 금융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을 수 있다.
이 제도는 2023년 6월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금융사 내부통제 개선방안'에 내용이 처음 담겼으며, 그해 바로 국회를 통과해 작년 7월부터 시행됐다. 우선 은행과 지주들이 먼저 적용을 받았으며 자산총액 5조원이 넘는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들은 올해 7월2일까지 책무구조도를 제출해야 한다. 현재 증권사 19곳과 자산운용사 8곳이 시범적으로 가안을 제출한 상태다.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은 작년부터 은행, 보험, 증권, 운용 등 업권을 가리지 않고 책무구조도 도입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다. 신한금융그룹, KB금융그룹, JB금융그룹, 메리츠금융지주, 한국투자금융지주 등의 계열사를 비롯해 카카오뱅크, 중국은행 서울지점, 미래에셋생명보험, 한화생명, 푸본현대생명, iM라이프, 흥국생명, 흥국화재, ABL생명, 동양생명, DB금융투자, 유안타증권, LS증권, SK증권, 흥국자산운용, 삼성자산운용, 이지스자산운용, 삼성SRA자산운용 등 약 서른 곳의 책무구조도 마련을 지원했다. 곧 하나은행의 책무구조도 고도화 프로젝트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김 파트너는 직접 컨설팅을 해보며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과거에는 금융사고가 작게 나더라도 영업을 잘하고 이익을 많이 실현하는 임원이 승승장구하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내부통제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며 "특히 올해는 경제 환경이 되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내부통제에는 투자를 더 해서라도 강화해야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KB금융, 신한금융그룹과 그 계열 증권사들은 책무구조도만 전담하는 팀을 신설하는 등 인력과 비용에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는 모습이다.
업권을 두루 만나본 김 파트장은 증권을 책무 배분이 가장 난해한 업권으로 꼽았다. 김 파트너는 "은행은 수신, 여신, 외환, 펀드판매 부서가 정해져있고 여신업에 대해선 여신전문 부행장이 총괄하는 형태"라며 "반면 증권업은 분야가 은행보다 다양하고 여러 부서에서 같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어 책무를 배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똑같은 업무를 취급하는 부서인데도 사업성을 검토하는 기준이 서로 다른 경우도 있었다"며 "컨설팅 과정에서 통제 수준을 상향 평준화해 맞추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 파트너가 꼽는 책무구조도 도입의 주요 포인트는 두 가지다. 첫 번째,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 자리를 겸직하면 안된다. 이사회가 경영진을 제대로 견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두 번째, 여러 임원에게 하나의 책무를 중복 배분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증권사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을 진행할 때 '본부장→그룹장→부문 대표' 순으로 결재를 받아야 한다면 가장 상위에 있는 부문 대표에게만 책무를 배치하는 식이다. 이에 따라 상위임원들의 하위 조직 관리, 감독 의무는 더욱 강해질 전망이다.
김 파트너는 "금감원에서는 여러 임원이 중측적으로 책임을 지는 구조일 때 하위 임원은 빼고 상위 임원에게 책무를 배분해 책무 중복을 피하도록 권고하고 있다"며 "만일 부서별로 업무가 겹칠 경우엔 부서명을 넣어 범위를 국한해 책무가 중복되지 않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사고 책임 명확해진다…절차 완화 검토는 필요"
문제가 생긴 지점이 어디인지에 따라 책임을 지는 임원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금융투자상품 판매 과정은 판매 기준 마련, 상품 소싱, 판매, 사후 관리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만일 운용사와의 짬짜미로 구조가 불투명한 상품을 소싱해 문제가 발생했다면 상품 소싱을 담당한 IB사업 임원이 책임을 진다. 그러나 상품에 문제가 없었고 단지 판매 절차에서 창구 직원이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아 사고가 발생했다면 리테일사업 임원이 주된 책임을 지게된다.
김 파트너는 과거 사례에 대입해 "라임사태의 경우 증권사가 상품 소싱 부문에 책임을 져야하고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는 은행이냐 증권사냐에 따라 다른 조직에서 책임을 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DLF의 구조가 복잡한 상품이라는 점에서 은행에서 판매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이 있기 때문에 상품 소싱부터 문제삼을 수 있다"며 "다만, 증권에서는 소싱 부문에서는 책임이 덜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 파트너는 벌써부터 증권사에 변화가 생겼다고 전했다. 컨설팅 단계에서부터 임원들이 자신의 책무를 진지하게 돌아보게되는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김 파트너는 "책무구조도를 도입하면서 그동안 회색지대에 있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며 "그동안 임원들끼리 (책임 소재가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방치한 것들이 많았다는 반증"이라고 말했다. 이어 "영업부서는 영업만 하고 사후 고객관리를 위한 서류 전달에는 무신경한 경우가 많았다. 동시에 관리 부서에서도 영업 부서에서 준 고객 명단을 다시 확인하지 않고 전달만 한다"며 "만일 명단에서 빠졌을 경우 누가 책임질지에 대해 고민하고 법에 어떤 규정이 있는지 살펴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례로 한 증권사는 대체거래소 관련 업무에 대해 책무 배분을 하는데 무려 2시간이 걸렸다는 전언이다. 파트너는 "누가 최선집행기준을 세우고, 누가 그 기준대로 거래가 잘 체결됐는지 검증할지를 논의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며 "책무구조도가 없었다면 대체거래소 관련 업무의 책임 소재도 유야무야됐을텐데 이번에 책무구조도를 작성하면서 관련 책임도 명확해졌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증권사의 '영업 중심' 문화가 '내부통제 중심' 문화로 변화할 것이란 기대를 내비쳤다. 김 파트너는 "대표이사와 임원들이 정기적으로 소관 업무의 내부통제나 위험 관리 체계가 적정한지 점검하고 미비점을 보완함으로써 조직 전체의 내부통제 문화가 강화될 것"이라며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관련 규제와 기준을 인지하게 되고 금융사고를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 파트너는 책무구조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재에 관한 상세한 가이드라인 △적극적으로 도입에 임하는 회사들을 대상으로 인센티브 지급 △한시적 제재 유예 등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는 "회사들이 충분히 제도를 인지한 상황에서 제재가 이뤄져야 충분히 학습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신규사업을 추진할 경우 책무구조도 변경안을 수정 제출하는 절차를 완화할 필요도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는 책무구조도를 변경하려면 이사회 의결을 받아 7일 이내 제출해야 한다.
김 파트너는 "이사회를 여는 날까지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지 않고 기다리기는 어렵다"며 "그렇다고 억지로 이사회를 개최하다보면 실질이 아닌 또 형식에 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신규사업으로 인해서 책무구조도를 변경하는 경우에는 1개월 내에만 제출할 수 있도록 하거나, 당국에 먼저 제출한 후 이사회엔 사후 의결할 수 있도록 방식을 완화해주는 식으로 열어줬으면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