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형 스마트폰도 아니고 수억원의 아파트를 사는데 '매매 예약'을 거는 제도가 있습니다. 장기일반민간임대아파트 얘기인데요.
이 아파트는 통상 10년의 의무 거주기간이 지나면 분양 전환되는데, 이때 분양권을 사겠다고 임차인이 미리 예약을 거는 거죠. 수억원의 예약금을 내고요.
문제는 이 예약금의 산정 방식이나 보장 등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어 '부르는 게 값'이라는 건데요. 이렇게 위험한 아파트를 분양받는 이유가 뭘까요?
10년 후 분양이지만 '매매예약금' 먼저..
민간임대주택은 크게 '공공지원민간임대'와 '장기일반민간임대'로 크게 나뉩니다.
공공지원민간임대는 임대사업자가 주택도시기금 출자, 용적률 완화 등의 공공지원을 받아 건설·매입한 뒤 임대하는 주택이고요. 장기일반민간임대는 그 외 주택을 10년 이상 임대할 목적으로 취득해 임대하는 주택인데요.
공공지원민간임대의 경우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민특법) 제42조에 따라 주거지원대상자 등의 주거안정을 위해 국토교통부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따라 공급해야 합니다.
청약 지원 자격이 까다로운 편이죠. 무주택자면서 청약통장 가입자여야 하고 소득이나 자산 등 제한도 있고요. 최초 임대료로 민특법에 따라 정하게 돼 있는데 통상 시세보다 저렴하게 책정하고요.
반면 장기일반민간임대는 문턱이 낮습니다. 민특법상 '임대사업자가 정한 기준에 따라 공급'하게 돼 있어 대부분의 장기일반민간임대는 주택 소유 여부나 소득 등과 관계없이 청약할 수 있거든요.
그러나 임대료 등도 임대사업자가 정하게 돼 있어서 시세보다 저렴하지 않은 단지도 많은데요. 그럼에도 일부 장기일반민간임대 아파트는 세자릿수 청약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인기가 끄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확정 분양가'인데요.
공공지원민간임대의 경우 의무 거주기간이 종료돼 분양전환을 할 때 분양가 심사를 받아 분양가를 책정합니다. 분양 시점의 집값 시세와 비슷하게 분양가가 책정되겠죠.
반면 장기일반민간임대는 처음 임대를 시작하는 계약 시점에 분양가를 확정(확정형 분양)하기도 하는데요. 10년 뒤 분양가인 만큼 향후 부동산 상승세를 타면 높은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감이 높습니다.
임차인이 향후 분양권을 얻기 위해선 '매매 예약'을 하는데요. 사업 시행자는 매매 예약자에게 분양권을 준다는 명목으로 '우선 양도 확인서'를 주고 '매매 예약금'을 받습니다.
결국 임차인은 소유권 이전도 되지 않은 주택에 임차보증금과 월 임대료 외에도 추가로 매매예약금을 내야만 10년 뒤 나올 분양권을 얻을 수 있는 셈이죠.
통상 임차보증금과 매매예약금이 각각 수억원에 달하기 때문에 임차인 입장에선 부담이 큰데요.
다만 분양 전환 전까지는 주택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취득세, 보유세 등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요. 무주택자라면 무주택 기간이 유지되기 때문에 다른 청약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인기 확 식은 이유는?
장기일반민간임대는 2020~2021년 부동산 상승기 때 활발하게 공급됐습니다. 집값 폭등으로 정부의 분양가 규제가 강화되자 사업시행자들이 '꼼수 분양'에 나선건데요.
분양 대신 임대로 돌릴 경우 보증금 등은 가격 규제가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책정할 수 있고 별도의 매매예약금까지 받을 수 있으니 시행자가 원하는 수준의 값을 매길 수 있거든요.
가뜩이나 높은 주택 청약 시장에 지친 청약자들도 문턱이 낮은 장기일반민간임대에 눈을 돌렸고요.
부동산 상승 기류를 타면서 일단 청약을 받은 뒤 웃돈을 붙여 분양권을 전매하는 식으로 투기를 하기도 했는데요. 이에 일부 아파트는 높은 청약경쟁률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집값 하락기에 접어들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매매예약'의 위험성이 드러나면서 계약자들의 불안감이 점점 커졌는데요.
매매예약금은 법적 제도가 아닌 일종의 관행이기 때문에 법정 비율 등 산정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부르는 게 값'이나 다름 없죠.
보호 장치도 없습니다. 소유권 이전이 10년 뒤에야 이뤄지는데 그때 시행사 부도 등 변수가 생겨도 법적으로 매매예약에 대한 제재나 임차인 보호 규정이 없어 분양권은 커녕 매매예약금도 보장받기 어렵습니다.
다수의 매매예약이 비공식적으로 진행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실제로 서울 도봉구 '도봉 롯데캐슬 골든파크'(282가구)의 임차인 모집공고를 보면 '당해 주택은 임대의무기간 종료 후 임차인에게 분양전환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음'이라고 표기돼 있는데요.
그러나 계약자들에게 따로 확정분양가를 알리며 우선분양권을 약속했다가 계약 이후 매매예약금 약 3억원을 납부할 것을 통보했다고 알려져 갈등으로 번진 상태입니다.
이같은 피해가 이어지자 국토부에서도 뒤늦게 나섰지만 아직까진 움직임이 소극적입니다.
국토부는 지난달 전국 17개 지자체 및 주택도시보증공사(HUG), 한국주택협회, 대한주택건설협회, 한국주택임대관리협회 등에 민간임대주택 매매예약과 관련한 권고사항을 담은 공문을 보냈습니다.
임차인 모집공고에 '장래 임대의무기간 경과 후 소유권을 양도하기로 미리 약정하는 건 관련법에 근거가 없어 우선변제권 등이 적용되지 않고 해당 계약을 체결하거나 유도하는 행위는 민특법에 저촉될 수 있음'을 포함하도록 권고한 건데요.
국토부 관계자는 "임대의무기간이 끝나면 자유롭게 당사자가 합의해서 매각할 수 있기 때문에 불법이라고 보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어 (추가 조치는) 좀 더 상황을 살펴보고 결정할 것"이라며 "우선 임대사업자가 강권을 하는 상황을 막으려면 업계의 자정과 승인권자의 지자체의 주의가 필요해 이번 권고 조치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달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회의에서 관련 지적이 나오자 원희룡 국토부장관이 '안전장치'를 찾겠다고 발언한 바 있는데요. 과연 어떤 조치를 할 지 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