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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경제학]①삼시세끼 전쟁…식문화 바뀐다

  • 2020.03.18(수) 08:59

코로나19로 재택 근무에 개학 연기까지
세끼 모두 집에서…'혼밥'에서 '집밥'으로
신선식품과 조리도구 등 요리 매출 급증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가장 중요한 대응법 중 하나는 바로 '사회적 거리두기'입니다. 그러려면 '방콕'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아이들 개학도 미뤄지면서 재택근무를 하는 직장인이 많아졌습니다. 가족이 함께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방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낯선 일상은 우리의 소비 패턴을 확 바꾸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강제 방콕'의 일상과 이에 따른 국내 유통·식품 산업의 변화를 살펴봅니다. [편집자]

아이는 요즘 부쩍 주방 놀이 장난감을 갖고 놉니다. 오래전에 사줬지만 사내 아이라 그런지 구석에 치워뒀던 건데요. 최근에 갑자기 이걸 꺼내오더니 이것저것 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채소를 썰고 과일을 깎는 시늉을 하며 '위험하니까 가까이 오지 마'라는 얘기를 하곤 하는데요.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엄마, 아빠가 평소에 하는 행동을 따라하는 겁니다.

맞벌이 부부 가정인 탓에 그동안 아이는 부모가 요리하는 걸 자주 보지는 못했습니다. 보통 주말에 국이며 반찬이며 몰아서 해놓고는 일주일을 어떻게든 버티는 식이었으니까요. 주말이 되면 외식하는 경우가 많았고요. 그런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아이는 부모가 요리하는 모습을 하루 종일 옆에서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흥미가 생긴 거겠거니 싶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강제 방콕 생활'은 우리 삶의 많은 것을 바꿔놓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으로 변하고 있는 부분 중 하나가 '식(食)' 문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평소에는 회사나 학교에서 밥을 먹거나 지인들과 술자리를 하고, 또 가족끼리 외식을 하기도 해 집에서 먹는 끼니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요. 요즘은 가족이 집 식탁에 모여 그야말로 '삼시 세끼'를 챙겨 먹어야 하니 큰 변화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각에선 '삼시 세끼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실제 집안 곳곳에선 이에 따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쌀, 생수, 야채, 계란, 우유 등이 빠르게 소진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동안에는 주로 1~2주에 한 번 마트에 가거나 온라인으로 장을 보면 충분했는데요. 이제는 주 중에도 부지런히 장을 봐야 합니다.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몇 시간 만에 오곤 했던 신선식품들은 이제 하루가 지나야 도착합니다. 그러니 한 번에 살 때 많이 사두는 버릇도 생겼습니다. 어차피 남을 일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만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최근 온·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은 일제히 신선식품 등 먹거리 할인 행사에 나섰는데요. '집 밥 문화'가 빠르게 확산하며 관련 매출이 늘어나자 이에 대응해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려는 겁니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이마트에 따르면 지난달 계란, 당근, 양파, 감자 등 '요리'에 사용되는 식재료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30%가량 늘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집 밥의 대표적인 반찬이었지만 '혼밥 트렌드'와는 맞지 않았던 고등어와 삼치 매출이 20% 늘어난 것도 흥미롭습니다. 온라인 업체인 G마켓에서도 지난 1일부터 10일까지 신선식품 매출은 51%, 생수와 음료는 30%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한 번에 많이 사는 분위기도 확산하고 있는데요. 홈플러스에 따르면 '대용량 소비'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홈플러스가 대용량 제품을 전문으로 파는 온라인몰 더 클럽 매출은 지난 2월 10일부터 한 달간 빠르게 늘었다고 합니다. 특히 신선식품의 경우 328%나 늘어나는 등 먹거리가 전체 매출 신장을 주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기존에는 쌀도 1~4kg 제품 위주로 팔렸는데 최근에는 10~20kg 제품 판매가 빠르게 늘고 있다"라며 "전반적으로 한 번에 구매하는 단가가 높아진 분위기"라고 설명했습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나 봅니다.

요리를 하고 밥을 먹었으면 설거지를 해야 합니다. 하루에 세 번 이상 설거지를 하는 것도 '일'입니다. 그래서 세제 판매량도 늘었다고 합니다. 온라인 유통업체 옥션에서는 지난달 10일부터 한 달간 세제 판매량이 39%가량 늘었다고 합니다. 행주는 82%, 호일은 42%, 랩은 23% 증가했다고 하니 다들 집 밥과 설거지에 시달리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오랜만에 집중적으로(?) 요리를 하다 보니 조리 도구를 새로 사야겠다거나 오래된 걸 교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옥션에 따르면 식기세척기 판매량은 93%, 프라이팬은 448%, 전기 찜기는 80% 늘었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조리 도구를 재정비하는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그렇게 삼시 세끼를 해결하고 하루가 지나면 술 한 잔 생각납니다. 물론 회식 자리도 없고 지인들과 만나 술 한잔하는 것도 어려운 요즘입니다. 그래서 터덜터덜 근처 편의점에 가서 술을 사 오곤 합니다. 매일 맥주만 마시면 질리니 와인도 사고 막걸리도 사봅니다. 

다들 그런 걸까요. 국내 편의점 업계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이후 주류 판매량이 일제히 상승했다고 합니다. 편의점이나 대형마트에서는 맥주와 소주는 물론 와인과 막걸리 매출도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아마도 가사노동 뒤 '힐링'을 위한 홈(Home)술일 겁니다.

'사재기'라고 하면 공포감이 떠오릅니다. 전쟁통이나 최근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전염병이 돌 때 생필품 생산이나 유통망이 마비되는 상황에 대비해 무작정 많이 사두는 게 바로 '사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분위기에서는 사재기의 공포감까지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얼마 전 대구·경북 지역처럼 심각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생산도 유통도 나름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최근의 분위기에서는 공포감보다는 고난이 읽힙니다. 삼시 세끼를 집에서 챙겨 먹어야 하는 이들의 고난 말입니다. 물론 가족과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는 건 즐거운 일일 수 있지만 하루 종일 주방에서 서성이고 있어야만 하는 건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좋든 싫든 기존 식 문화가 새롭게 바뀌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점차 코로나19 사태가 잦아들고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다 같이 조금만 더 힘을 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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