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커머스 증시 진출 원년'이 될 것으로 기대됐던 2023년이 '상장 실패의 해'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컬리, CJ올리브영, 오아시스, 11번가, SSG닷컴 등 내로라하는 플랫폼 기업들이 잇따라 상장에 도전했지만 모두 중도 하차를 선언했다.
예상치 못하게 투자심리가 얼어붙는 등 주변 환경이 여의치 않았던 데다 상장과 추가 투자 확보를 위해 몸집 불리기에만 몰입했던 것이 결국 독으로 돌아왔다는 지적이다.
옛 말은 언제나 옳다
올해 유통업계의 상장 이슈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이다. 지난해 하반기까지만 해도 2023년은 유통업계 '상장 대목'의 해가 될 것으로 전망됐다. 몸값이 3조~4조원대로 예상된 CJ올리브영과 컬리는 2023년 IPO 최대어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했다.
2023년이 4분의 3 가까이 지난 지금 이들 중 상장 고지에 근접한 곳은 하나도 없다. 가장 먼저 백기를 든 곳은 CJ올리브영이다. 2021년 11월 주관사 선정과 함께 상장 작업에 들어갔던 CJ올리브영은 IPO시장이 얼어붙자 2022년 8월 상장 작업 중단을 선언했다. 연초까지만 해도 올해 중 다시 상장 작업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움직임이 없는 상태다.
SSG닷컴 역시 2022년 상장을 목표로 주관사를 선정했지만 예비심사조차 신청하지 않으며 사실상 상장을 철회했다. 회사 측은 기업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면 다시 상장을 진행한다는 입장이지만 사실상 근시일 내 상장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컬리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상장 연기'설이 돌았다. 최대 4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됐던 기업가치가 갈수록 하락했기 때문이다. 김슬아 대표는 "기한 내 상장"을 선언하며 의지를 키웠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새해 들어 기업가치가 1조원 밑이라는 분석까지 나오자 백기를 들었다.
연이은 상장 실패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는 한다"를 외쳤던 오아시스와 11번가 역시 다른 길을 모색 중이다. 오아시스는 상대적으로 적은 1조원대 몸값이라는 점, 컬리·SSG닷컴·11번가와 달리 흑자 경영 중이라는 점을 내세워 이커머스 상장 1호 타이틀을 노렸지만 기관 대상 수요예측에서 흥행에 실패하며 상장 철회 코스를 밟았다.
재무적 투자자와 약속한 상장기한이 이달 말로 다가온 11번가는 상장 여부가 아닌 매각 여부가 더 중요해졌다. 이미 티몬·위메프를 집어삼킨 큐텐, 11번가와 손을 잡았던 아마존 등이 인수 여부를 타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게 다 남 탓?
기업은 상장 보류 혹은 취소 소식을 알리며 하나같이 '기업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얼어붙은 시장 상황' 등을 이유로 제시했다. 상장 선언 후 변화한 주변 환경 때문에 기업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상장을 미루는 것이라는 해명이다.
하지만 상장 실패 요인을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컬리의 경우 매출이 2019년 4259억원에서 지난해 2조372억원으로 3년 새 5배 가까이 급증했다. 하지만 이 기간 영업손실도 1013억원에서 2335억원으로 배 이상 늘었다. 컬리의 최근 4년간 영업손실액만 6600억원이 넘는다.
SSG닷컴과 11번가 역시 적자 기업이다. SSG닷컴은 2021년, 2022년 연속으로 1000억원대 적자를 기록했다. 올해에도 적자 규모는 줄였지만 여전히 '마이너스 영업'을 하고 있다. 11번가는 2020년 4분기부터 지난 2분기까지 11개 분기 연속 적자 행진 중이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상장을 고려할 때가 아니다.
업계에서는 상장을 노리는 기업들의 '선성장 후안정' 계획이 더 이상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다가오지 않는 것을 연이은 상장 실패의 원인으로 바라보고 있다. 내실은 제쳐둔 채 외형 성장에만 집중하는 스타트업형 기업 운영에 불신이 생겼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일단 몸집을 불려 투자가치를 인정받은 후 수익성을 고민하면 된다는 경영 방식에 의문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며 "최근 상장에 실패한 기업 대부분이 적자기업이거나 이익률이 낮은 기업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