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소재들을 다룹니다. 먹고 입고 거주하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우리 곁에 늘 있지만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들에 대해 그 뒷이야기들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보려 합니다. [생활의 발견]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여러분들은 어느새 인싸가 돼 있으실 겁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 [편집자]
지난 휴일, 장을 보러 갔습니다. 선홍빛 돼지고기를 보다보니 군침이 돌더군요. 육류 코너를 지나며 삼겹살, 고기만두, 돼지고기 김치찌개, 제육볶음 등 다양한 음식들이 떠올랐습니다. 일상에서 종종 접할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이죠. 공통적으로 돼지고기가 들어갑니다.
돼지고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소비하는 육류입니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연간 돼지고기 소비량은 2022년 기준 30.1㎏에 달합니다. 2013년엔 20.9㎏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연평균 4.9%씩 꾸준히 증가해온 셈입니다.
돼지고기에는 아미노산과 불포화 지방산이 풍부하게 들어있다고 합니다. 불포화 지방산은 미세먼지나 중금속과 결합해 소변으로 배출시키는 효과가 있고요. 아미노산은 나프탈렌과 벤졸, 납 등 중금속의 체내 흡수를 막는다고 합니다.
돼지고기 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자란 돼지를 '한돈'이라고 부르는데요. 한돈은 수입산에 비해 가격이 더 비쌉니다. 신선도가 더 좋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수입육은 대부분 냉동, 진공포장 상태로 들여옵니다. 여기에 국내 수입 과정에서 물류, 검역 절차를 거치며 시중에 유통되기까지 한 달 이상이 소요되곤 합니다. 반면 한돈은 도축 후 시판되기까지 통상 3~7일이면 충분합니다. 덕분에 신선함을 유지하기 유리하죠.
그런데요. 최근 우연히 돼지 축산 관련 영상을 보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순수 우리 돼지 품종인 줄 알았던 한돈에 외래품종을 교배한 품종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번 [생활의 발견]에서는 가장 많이 취급되는 한돈 돼지품종은 무엇인지, 왜 우리 재래품종보다 교배품종을 더 많이 키우게 됐는지 등을 다뤄보려 합니다.
가장 흔한 '영국+덴마크+미국' 교배품종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소비하는 한돈 품종은 'YLD'입니다. YLD는 3개종이 섞인 품종입니다. 영국이 원산지인 '요크셔'(Y)와 덴마크 기원인 '랜드레이스'(L)를 교배한 잡종 'YL'에 미국 돼지 듀록(D)을 교배한 것이죠.
YLD은 일반 소비자들에게 익숙한 살짝 핑크빛이 도는 흰색 돼지입니다. 이같은 3원 교잡종 방식은 국제적으로도 널리 사용되는 표준적인 방법입니다.
어쩌다 우리나라엔 돼지 교배종이 많아졌을까요. 한돈 산업에서 교배종이 주를 이루는 것은 생산성과 경제성을 고려한 결과입니다. 요크셔와 랜드레이스는 모두 번식 능력이 좋습니다. 생산 능력을 극대화한 YL에 육질이 좋은 듀록을 교배했으니, 맛도 좋고 생산력도 좋은 YLD 품종의 경쟁력이 더 좋았겠죠.
반면 흑돼지를 포함한 우리나라 토종 품종은 개량종보다 사육 기간이 길고 산자(産子) 수가 낮아 수익성 확보가 어렵습니다. 그 탓에 대규모 사육이 불가능했던 겁니다.
부업에서 전업으로
한돈자조금협회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 국내 돼지 품종은 우리나라 '토종돼지'와 수입종인 영국 버크셔 지방 출신인 '버크셔'가 주를 이뤘습니다. 버크셔의 경우 털 색은 까맣지만, 안면과 네 다리, 꼬리의 끝부분은 하얀 것이 특징입니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국내 돼지 사육은 각 농가에서 몇 마리씩 기르는 수준이었습니다. 생활비를 보태는 부업 정도였죠. 그러다 국내 양돈산업에 점차 변화가 생겼습니다. 대량 생산을 위해 빠르게 성장하고 더 많은 새끼를 낳는 흰색 계통의 품종을 취급하는 농가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양돈을 전업화한 농가가 늘면서 생산성을 따지기 시작한 겁니다.
양돈산업 규모가 커지면서 소비자의 기호와 요구도 늘었습니다. 그러자 이런 니즈에 맞춘 돼지고기 상품이 생산되기 시작했죠. 이를 위해서는 한층 정교하고 전문화된 구조가 뒷받침돼야 했습니다. 정부에서도 양돈산업을 장려하기 시작하면서 국내 양돈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여기에 전문지식을 갖춘 전문가 집단 활동과 한돈 연구와 홍보를 위한 자조금 제도도 마련됐습니다.
토종돼지 살리기 도전
현재 시판 중인 한돈은 여전히 외래 교배종 비중이 큰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재래돼지 유전자를 활용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거나 외래품종을 국산화하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재래돼지는 한반도 지역에서 오랫동안 적응하며 살아온 재래품종을 말합니다. 재래돼지는 '축진참돈' 계통과 '제주흑돼지' 계통으로 나뉩니다.
'우리흑돈'은 국립축산과학원에서 복원한 재래돼지(축진참돈)와 자체 개발한 개량종(축진듀록)을 활용한 품종입니다. 2015년에 개발됐습니다. 수입 씨돼지(종돈)가 아닌 국내 품종만으로 개발한 유일한 흑돼지입니다.
우리흑돈은 근내지방 함량이 4.3%(재래종 4.5%)로 일반 돼지(3%)보다 높습니다. 참고로 근내 지방 함량이 높을수록 풍미와 부드러운 식감이 증가하고 가열 시에도 육즙이 유지됩니다. 덕분에 우리흑돈은 탄력 있는 육질과 단단한 지방이 특징인데요. 육즙이 풍부하고 고소한 맛이 난다고 합니다.
'난축맛돈'은 육질이 좋은 '제주재래흑돼지'와 번식력과 성장이 뛰어난 '랜드레이스' 품종을 활용한 품종입니다. 2023년 축산과학원이 제주재래흑돼지에서 맛 관련 유전자(MYH3 변이)를 적용해 개발했는데요. 난축맛돈은 근내지방 함량이 10% 정도로 높아 육질이 특히 부드럽습니다. 수분을 보존하는 능력도 우수합니다. 또 삼겹살과 목심 외에 저지방 부위로 알려진 등심, 뒷다리 등 비선호 부위도 구워 먹을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입니다.
외래 품종을 국내에서 개량하고 토착화하는 연구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축진듀록'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종돈(種豚)을 들여와 10년에 걸쳐 우리 환경에 맞춰 개량한 품종입니다. 또 지리산 흑돈 브랜드로 육성 중인 '버크셔K'도 있습니다. 2000년대 웰빙 열풍으로 흑돼지가 주목 받으면서 지리산과 강원도 북부 해안지역 농가들이 협력해 토종돼지와 버크셔를 사육해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재래돼지 개량종의 사육량은 아직 외래돼지 교배종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편입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한돈이 외국산과 큰 차이가 없음에도 마치 한돈에만 영양학적 우수성이 있는 것처럼 홍보해 비싸게 판매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한돈보다 저렴한 수입육을 선호하는 이들도 늘고 있죠.
냉장물류시스템이 개선되고 AI(인공지능)과 같은 첨단 기술이 발전하면서, 외국산과 한돈의 육질 차이가 줄어든 영향도 있습니다. 이에 따라 시장 개방으로 외국산과의 경쟁은 심화하고 있고, 탄소 중립, 동물 복지 등에 관한 세계적인 관심이 커지면서 국내 축산물의 경쟁력 향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육류는 무엇을 먹고 어떻게 길러졌는지, 도축 후 신선도를 얼마나 잘 관리했는지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다만 맛은 주관적인 영역인 만큼 누가 옳다 그르다를 논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같은 값이면 더 맛있는 돼지고기를 고를 겁니다. 우리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는 한돈이 향후 우리나라를 넘어 글로벌 소비자들의 입맛도 사로잡을 날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