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일(가명·67)씨는 15년간 추심을 피해 방랑생활을 이어왔다. 화투 노름에 빠져 카드빚을 끌어 쓴게 화근이었다. 한곳에서 돈을 빌려 다른 곳을 메꾸는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다. 빚은 어느샌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추심원을 피해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 이어졌다. 이씨가 잠수를 타자 추심원은 이씨의 가족을 찾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추심에 이씨의 아내와 아이들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다. 이씨의 아내는 결국 이씨의 주민등록을 말소시켰다. 추심이 멈췄지만 이씨의 생활은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병원도 갈 수 없고 취직도 할 수 없었다. 일용직 근로자로 살아오던 이씨는 예순이 넘으면서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동사무소를 찾아 정상적 신분을 되찾고 싶지만 30만원 가량의 과태료를 낼 만한 재정적 여유조차 이씨에겐 없었다. 과거 추심에 시달렸던 기억이 떠올라 용기도 나지 않는다.
가계부채를 취재하다 접한 한 가장의 사연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9월말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1573조원에 달한다. 우리나라 인구가 5100만명임을 감안하면 한명당 평균 3100여만원의 빚이 있는 셈이다. 가계부채를 가리켜 우리나라 경제의 뇌관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돈을 빌린 이유는 제각각이다. 부동산 구매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일시적인 생활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오랜시간 분할상환을 해야 하는 경우 신변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미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직장과 건강 등의 이유로 형편이 달라져 향후 돈을 갚지 못하게 됐을 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금융기관은 해당 채권을 갖고 있어봤자 회수가 어렵다고 판단하면 헐값에 팔아버린다. 채권을 매입한 곳은 추심에 나서 돈을 받아 차익을 챙겨 이익을 올린다.
어느 시기 '귀하의 채권이 ○○신용정보회사로 이동했습니다'는 연락을 받는데 바로 이때가 본인의 채권이 금융사에서 신용정보회사로 이동한 시기다. 채무자는 채무를 변제할 때까지 여러가지 형태의 추심을 받게 된다.
과거 추심 행위에는 잔혹한 방법들이 다수 동원됐다. 추심업자가 채무자 가족을 찾아가 안방에 앉아 담뱃불을 바닥에 비벼 끄는가 하면,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 책상서랍에 빨간색 압류딱지를 붙여 필기구를 꺼내지 못하게도 했다.
지금이야 채권추심법이 제정돼 추심 행위에 여러 제한이 걸려있지만 추심을 당해 본 경험자들은 대부분 극도의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가족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운 것은 둘째치고, 시도때도 걸려오는 추심 전화와 금융거래 이용불가 조치 등으로 사회에서 내쳐진 생각이 든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매년 27만명의 금융채무불이행자가 새롭게 등장한다. 이중 합법적 채무조정에 나서는 채무자는 많아야 17만명 수준이다. 나머지 10만명이 잠적과 도피 생활로 치닫는다. 전국 곳곳에 숨어있는 이씨와 같은 사람들이 10만명에 달한다는 얘기다.
인생의 밑바닥을 보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개인회생·파산 제도에 대해 도덕적 해이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해당 제도를 이용하려면 어느 정도의 사회적 낙인이 뒤따르는 만큼 불이익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법원이 판단 주체이기 때문에 제도 악용도 쉽지 않다.
연체채무자를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관심은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어떤 사회적인 시스템을 만들 것인가에 맞춰져야 한다. 잠적·도피 채무자는 개인적인 삶의 문제 뿐 아니라 각종 사건 사고에 노출 또는 연루될 수 있다. 채무의 시작은 개인의 판단일 수 있어도 이를 해결하는 건 모두의 일인 셈이다.
그래서 이달초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올해 추진과제는 반갑다. 여기에는 연체채무자가 금융회사에 상환계획 변경을 요청할 수 있는 '채무조정요청권'을 부여하는 것과 그동안 금융사 등이 '기한이익 상실시 원금전체 즉시상환을 요구하면서 상환이 안된 원금 전체에 연체가산이자를 부과하는' 관행을 제한하는 방안 등이 포함됐다.
금융당국 추진과제는 시중은행과 제2금융권 등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예정이지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을 업권은 단연 추심업계와 대부업계다. 현재는 계획에 지나지 않지만 실제 시행안으로 발표되면 추심 행위에 상당한 제한이 걸려 이익을 창출하기가 까다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빚은 갚는 게 맞다. 다만 금융회사가 대출 한도에 꼭 맞는 이용을 권유하면서 대출량을 늘린 이후 채무자 변제능력을 고려하지 않은채 연체 채권을 지체없이 팔아버리는 행위에 문제가 없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채권자와 채무자가 각자의 책임을 다시 들여다볼 기회가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