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정초부터 금융권 주요 인사들이 하나같이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지난해가 '불황'의 시작이었다면 올해 상반기 중에는 이 불황이 정점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이다.
금융권에서는 특히 대출 부실화가 본격화할 가능성을 예의주시하는 모습이다. 지난해 급격하게 오른 금리가 올해 추가로 오를 가능성이 높아서다. 여기에 올해 그동안 취급된 변동금리 대출에 지난해 시장금리 인상분을 본격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부실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란 관측이다.
경제·금융 수장들 '위기' 경고 한 목소리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3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범금융권신년인사회'에 참석해 "위기는 아직 진행중"이라며 "여전히 높은 불확실성과 변동성 속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새해에는 경기둔화가 본격화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역시 이날 행사에서 모두 '불확실성' '위축' 등을 강조하며 2023년이 쉽지 않은 한 해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정부부처 수장들 뿐만 아니라 금융권 CEO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내 주요 금융지주 회장들과 은행장들은 전날 시무식 이후 내놓은 신년사를 통해 임직원들에게 올해 '경제위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문했을 정도다.
위기 기승전결…기=금리
일단 현재 금융권에서 이야기하는 위기의 근원지는 '금리'다. 지난해 한국은행은 유례를 찾기 힘들정도로 빠른 속도로 기준금리를 올렸다.
구체적으로 한국은행은 지난해 8번의 통화정책방향 금융통화위원회에서 7번이나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특히 이중 2번은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 올리는 '빅스텝' 이었다. 이에 지난해 초 1%였던 기준금리는 연말 3.25%까지 치솟았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정책을 도입한 이후 처음있는 일이다.
자연스럽게 시장금리 역시 상승하면서 가계의 이자부담도 커졌다.
2021년말 2%대였던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2022년 말에는 7~8%까지 치솟은게 대표적이다. 통상 주택담보대출은 주택이라는 자산을 담보하고 있어 금융권이 취급하는 가계대출중 금리가 가장 낮은편에 속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중·저신용자의 신용대출 수준으로 치솟은 것이다.
가계의 이자부담은 흔히 '고정지출'로 분류된다. 매달 지갑에서 빠져나가야 하는 돈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러한 고정지출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다른 부분에서의 지출을 줄일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 경제회복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으로는 코로나19로 인한 내수침체가 주요 원인으로 꼽혀왔다. 정부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로 '완만한 내수회복'을 기대해 왔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금리가 연이어 오르면서 가계 이자부담이 커지자 다시 내수침체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가계의 이자부담 최소화를 위한 작업에 돌입해 가계부채의 '연착륙'을 꾀하고 있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다. 한국은행이 올해에도 기준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이와 관련 시장에서는 한국은행이 올해 못해도 기준금리를 3.5%까지 인상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위기 기승전결…승=대출 부실화
금리인상으로 인한 위기는 대출의 부실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자가 너무나도 빠르게 치솟다 보니 가계는 물론 기업까지 그동안 받은 대출이자를 갚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단 현재까지 나타난 지표는 양호하다. 위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22년 10월 은행의 원화대출 연체율 현황을 보면 기업대출의 연체율은 0.26%, 가계대출의 연체율은 0.22%로 집계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기업대출과 가계대출의 연체율이 1%대였다는 것과 비교하면 4분의 1수준이다.
하지만 이는 착시효과라는 경고가 나온다. 코로나19로 인한 금융권의 대출만기연장, 이자상환유예 등의 정책이 펼쳐지고 있어 연체율이 급등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은행들이 부실화된 대출채권을 정리하는 규모가 늘어나는 점도 연체율을 줄이는 이유로 꼽힌다. 은행은 통상 연체로 회수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는 대출채권을 다른 금융회사 등에 팔아 연체율 등 건전성을 관리한다.
은행이 다른 금융회사에 넘긴 대출채권의 규모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연체율속에 가려진 대출의 부실화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 지난해 10월까지 국내은행이 정리한 연체채권 규모는 8조1000억원에 달한다. 지난해 국내은행의 대출 잔액이 월 평균 8조원 가량 늘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달동안 새롭게 취급한 대출만큼 이미 연체가 시작됐다는 의미다.
은행 관계자는"부실화된 대출채권 정리 규모가 예년보다 큰 것은 사실"이라며 "대출의 부실화는 금리가 정점을 찍을 올해 더욱 본격화 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시장금리 인상분이 이미 취급된 대출에 올해부터 본격 적용된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관계자는 "지난해 기준금리 인상분이 올해에 본격적으로 가계와 기업이 체감하게 될 것"이라며 "통상 변동금리 대출의 경우 6개월 마다 금리를 재산정하는데 올해 지난해 상승분이 이미 취급된 대출에 반영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위기 기승전결…전=금융회사 불안
이처럼 대출이 부실화 되기 시작하면 금융회사의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전 금융권에서 가장 크게 우려하는 부분도 이 부분이다.
국내 주요 은행의 경우 예상보다 큰 충격으로 인해 연쇄 부실이 발생해도 이에 버틸 수 있는 기초체력은 갖췄다는 평가다. 다른 업권의 경우도 대형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중소형 금융회사다. 지난해 이미 가능성은 나타났다. 레고랜드발 채권시장 불안이 부동산 PF 위기로 이어지자 일부 금융회사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은 것이 대표적이다.
일례로 다올투자증권은 핵심계열사인 다올인베스트먼트를 매각하기로 했고 희망퇴직까지 진행했다. 케이프투자증권은 핵심 조직인 리서치본부와 법인영업부를 폐쇄하는 강수까지 뒀다.
은행 관계자는 "기업대출, 가계대출의 부실은 다양한 경로로 시장에 자금을 대는 금융회사에 전이될 수밖에 없고 시작은 중소형 금융회사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위기 기승전결…결='사후약방문은 막자'
시장금리 상승으로 인한 대출의 부실화, 금융회사 건전성 악화 등은 현재 같은 상황에서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게 금융권 인사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이를 막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이에 금융당국과 민간 대형 금융회사를 중심으로 취약차주 지원 등을 중심으로 하는 다각도의 정책을 예고하고 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이날 행사에서 "금리 급등에 따른 취약계층의 금융애로를 해소하기 위해 정책서민금융과 정책모기지 지원을 확대하고 가계와 소상공인 등의 채무조정제도도 정비하겠다"라고 말했다.
금융지주 관계자는 "전사적으로 금융당국의 정책에 발 맞추기 위해 취약차주 지원책을 준비하고 있다"라며 "이는 이미 CEO 주재 전략회의 주요 안건으로 떠올랐고 금융회사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자는 차원에서 올해 핵심 계획으로 자리잡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금융회사 관계자는 "이른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실적과 같은 부분은 일정 부분에서 포기하더라도 실물경제 지원에 최선을 다하자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