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본토산 원유 국내 도입이 속도를 내고 있다. 국내 정유사들이 주로 사들여 오는 중동산보다 가격이 저렴해 운송료를 감안해도 경제성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정유사 입장에서 미국산은 도입처를 다변화는 이점이 있다. 중동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할 수 있는 측면이다. 게다가 미국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한-미 통상마찰 가능성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WTI 가격 메리트 급부상
10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현대오일뱅크는 글로벌 석유기업 쉘(Shell)과 1억 달러 규모의 원유 200만배럴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다음달 초 100만 배럴을 들여오고, 나머지 물량은 6월 중 도입한다. 하루 정제량(약 39만 배럴)을 감안하면 약 5일 정도면 모두 소화 가능한 물량이다.
국내 정유사 중에선 GS칼텍스가 지난해 11월 미국 본토에서 채굴된 원유를 도입하기로 결정, 미국산 원유가 국내에 첫 선을 보였다. 이후 4개월여 만에 두 번째 도입 계약이 이뤄진 셈이다.
미국산 원유 도입의 가장 큰 이유는 경제성이다. 국내 정유사들이 주로 수입하는 중동산에 비해 미국산 가격이 싸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 감산에 합의하면서 두바이유를 중심으로 국제유가는 상승세를 기록했다. 이에 반해 서부텍사스원유(WTI)는 미국 셰일기업들의 생산량 증대가 가격 상승을 막는 요인으로 작용, 두바이유에 비해 가격 상승 폭이 둔화됐다.
이런 이유로 과거 두바이유보다 비쌌던 WTI 가격은 올 들어 역전현상이 발생했다. 가격 차이 폭도 커졌다. 최근 감산 합의 연장 논란에 유가가 다시 하락세를 기록하긴 했지만 여전히 두바이유 가격은 WTI보다 비싸다.
한국석유공사 페트로넷에 따르면 지난 7일 기준 WTI는 배럴 당 52.24달러, 두바이유는 53.94달러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미국의 원유 금수조치가 해제된 이후 미국산 원유 도입을 지속적으로 검토해 왔다”며 “계약 시점에 WTI 가격이 두바이유보다 저렴했고, 운송비 등을 감안해도 경제성이 있다는 판단에 도입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 중동 의존도 낮추고, 트럼프 눈치도 보고
지난해 GS칼텍스가 미국산을 결정했을 때만해도 다른 정유사들의 추가 도입 결정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WTI 가격이 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두바이유보다 비쌌고, 운송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미국산 원유는 중동산보다 운송 기간이 2배 가량 길다.
하지만 WTI 가격 경쟁력이 강화됐고, 중동 의존도를 낮춘다는 점에서 국내 정유사들이 미국산 원유 도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동안 국내 정유사들은 중동산 원유 도입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는 점을 지적받아 왔다. 중동 정세가 불안해 가격 변동이 크고,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도 중동 이외의 지역 비중을 높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지난 2월 누적 기준 국가별 원유도입비중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이란 등 중동 국가에서 전체 수입량의 84.06%(1억5358만8000배럴)를 들여왔다.
이에 더해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의 통상마찰을 줄일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에너지독립’을 외치며 석유 등 화석 에너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원유 개발을 가속화하고, 에너지 자원 수출 확대로 무역적자를 완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정부도 정유사를 비롯한 에너지 기업에 미국산 원유 및 가스도입 검토를 독려하고 있는 상태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원유 도입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가격”이라면서도 “미국산 원유를 들여오기로 했다면 도입처를 다변화하는 측면과 함께 정부 정책 등 여러 이해관계를 고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