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황은 짧고 불황은 길다.
조선업 사이클(순환주기)의 한 줄 요약이다. 호황기엔 한꺼번에 선박 발주가 몰리지만 불황기엔 공급과잉으로 장기간 도크(선박건조대)가 빈다. 25~30년에 이르는 선박 수명만큼이나 조선업의 사이클도 길 수밖에 없다. 90년대 입사한 한 대형 조선소 관계자는 "2010년대부터 불황은 장기화 되고 있지만 그 이전 연말 성과급이 나왔던 호황기는 2~3년으로 정말 짧았다"고 전했다.
◇ 연말 수주 잭팟 터졌다고?
현재 조선업은 장기불황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2009년부터 시작된 조선업 경기 침체는 11년째 이어지고 있다. 2010년대 초반 깊은 바다에서 석유를 생산하는 드릴쉽 등 해양플랜트 주문이 이어지는 '반짝 특수'가 일었다. 하지만 유가가 급락하면서 해양플랜트는 경쟁력을 잃었다. 저가 수주 후유증으로 국내 조선업계엔 수조원대 적자 '영수증'이 청구됐다. 드릴쉽 악몽은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다.관련기사☞삼성중공업, 더 깊은 바닥 판 드릴십 '악성재고'
특히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가 덮친 올해는 장기불황의 골이 가장 깊다. 지난 1~10월 전세계 선박 발주는 2100만GT(총톤수)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48% 줄었다. 이 기간 국내 조선사의 수주 목표 달성률을 보면 한국조선해양(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현대삼호중공업) 48.5%, 대우조선해양 46%, 삼성중공업 13% 등에 머물렀다. 지난달 한국조선해양은 올해 초 세운 수주계획을 37% 줄이기도 했다.
연말에 수주가 되살아나고 있지만 '수주 잭팟이 터졌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다. 막판 수주에도 연초 세운 목표치를 달성하긴 쉽지 않다. 한해 마감을 한 주가량 앞둔 현재 수주 목표 달성률은 한국조선해양 91%, 대우조선해양 74.5%, 삼성중공업 65% 가량이다. 한국조선해양의 달성률이 가장 높지만 지난달 수주 목표를 대폭 낮춘 것을 감안하면 만족할 성적은 아니다. 관련기사☞'수주가뭄-실적악화' 조선 악순환 내년에도…
◇ 내년 사업 계획 아직 못 잡아
조선업계에선 '오늘의 수주가 내일의 실적'이다. 올해 수주 가뭄이 2~3년 뒤 실적 악화로 돌아온다는 얘기다. 최근의 관건은 연말 반짝 살아난 선박 발주 분위기가 내년까지 이어갈 수 있느냐다. 바닥을 찍고 회복단계로 들어서느냐 단기 발주물량 증가 후 다시 장기불황이 계속 이어지느냐 갈림길이다. 조선사들은 내년 사업 계획을 짜고 있지만 전망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내년 사업 계획을 두고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며 "코로나19가 아직 진행 중인 점도 변수"라고 전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아직 사업계획이 확정되지 않았다"며 "내년 1분기에나 사업계획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적어도 올해보단 나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최근 산업연구원은 2021년 조선 수출규모가 202억7000만달러로 올해보다 2.8%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증가율을 보면 내년 하반기(-1%)보다 상반기(6.7%)가 좋다. 하지만 올해 극심한 수주 가뭄을 감안하면 2019년 수준으로 회복되는 수준에 머문다. 성장한다기보단 차도가 보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셈이다.
◇ 해운 운임 '역대최고'라지만…
조선업 시황을 미리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도 있다. 해운사 수익지표와 국제유가다. 올 하반기 들어 두 지표가 개선되고 있지만 조선업을 낙관하긴 어렵다.
해운업은 조선업의 전방사업이다. 해운사는 조선소에 발주를 넣는 주요 고객으로, 해운이 살면 조선도 살아날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인 해운사 수익 지표인 SCFI(상하이발 컨테이너 운임지수)는 지난 18일 2411.82를 기록했다. 2009년 이 지수를 집계한 이후 최고치다. 이에 힘입어 HMM(옛 현대상선)은 지난 2분기 21개 분기 만에 흑자전환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해운사 수익지표 개선이 선박 발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해운업 호황을 조선업이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최근 SCFI 상승세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상반기 물동량이 하반기로 몰렸기 때문"이라며 "내년에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해운사 입장에선 장기적으로 운임지수가 상승한다는 확신없이 '조 단위'가 들어가는 신규 선박을 주문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 물동량보다 선복량(배에 실을 수 있는 화물총량)이 많다. 여전히 공급 과잉"이라며 "당장 해운 운임이 좋아졌다고 선사가 배를 발주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보다 선박 크기가 커지면서 선박 발주 자체도 줄었다"며 "20~30년 전에 발주한 5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대)급 선박 3~4척을 폐선해야 1만5000TEU급 선박을 한 척 새로 발주할 수 있다"고 전했다.
◇ 또 다른 가늠자 유가도 '애매'
국제유가도 조선업의 동행지표다. 국제유가가 떨어지면 조선 수주량은 주는 반면 유가가 오르면 수주가 늘어난다는 얘기다. 전세계적으로 원유 사용량이 늘면 원류를 싣고 나르는 선박이나 원유를 생산하는 해양구조물 수요가 더 많아지는 원리다.
내년 2월 인도되는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최근 배럴당 48.12달러에 거래됐다. 코로나19 여파로 '마이너스 유가'까지 급락했던 지난 3월과 비교하면 안정세를 찾았다. 하지만 과거 100달러가 넘던 고유가 시대와 비교하면 아직 절반도 되지 않는 가격이다. 최근 원유가격의 상승세가 조선업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유가가 오르면 원유 운반선 운임이 좋아지고, 선사들이 선박 발주를 고민하게 된다"며 "최근 유가가 오르고 있지만 과거 배럴당 130달러까지 간 유가를 생각한다면 현재 가격은 애매하다"고 설명했다.
원유 가격 전망도 밝지 않다. 일정 수준 이상 원유 가격이 올라가면 지하 셰일층에서 뽑아내는 셰일오일 생산량이 늘어나, 공급과잉으로 다시 원유가격이 내려가서다. 세일오일의 채산성은 배럴당 40~50달러 수준으로 알려졌다. 전세계 원유 소비가 급증하지 않는 이상 원유 가격이 50달러 선을 뚫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 친환경 선박 주문 나오려나
조선업계가 그나마 가장 기대를 거는 부분은 친환경 선박이다. 전세계적으로 환경규제가 강화되면서 50년 넘게 선박의 원료로 사용하던 '벙커C유'는 퇴출 위기다. 이에 따라 친환경 선박에 대한 발주가 늘어날 것이란 기대는 수년째 부풀어 있는 상태다.
국제해사기구(IMO)는 올해 초부터 선박 연료유의 황 함유량을 현행 3.5%에서 0.5%로 강화하는 규제를 시행했다. 이런 규제에 따른 해운사의 대응책은 크게 ▲저유황유 사용 ▲선박에 탈황장치 스크러버(SOx scrub) 장착 ▲LNG연료 선박 도입 등 3가지다. 이중 조선소가 원하는 방식은 LNG연료를 사용하거나 스크러버가 장착된 선박을 신규로 발주하는 것이다. 관련기사☞ [르포]세계 최대 컨테이너선에선 "길 잃으면 구조전화"
해운업계 관계자는 "환경규제가 강화되면서 친환경 선박으로 가는 것은 맞지만 선사들은 아직 저유황유, 스크러버, LNG연료 선박 중에 어떤 방식이 효율적인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며 "올 한해 운영하면서 쌓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정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