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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준 회장의 '고해성사'

  • 2015.07.16(목) 17:46

[W's Insight]

권오준 포스코 회장의 목소리는 한결 같다. 조금은 느릿한 템포에 톤은 늘 조용하고 나즈막하다. 여기에 경상도 사람 특유의 억양이 정겹다. 마주한 사람으로 하여금 푸근한 인상을 준다. 공식석상에서 권 회장은 늘 같은 목소리를 유지했다. 차고 넘치는 법이 없다.

하지만 지난 15일 열린 포스코 기업설명회(IR)에서 권 회장의 목소리는 종전과 달랐다. 단상에 올라선 권 회장은 평소와 달리 살짝 높은 톤으로 또박또박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쓰여진 원고를 읽는 것이지만 말 한마다 한 마디에 힘이 실렸다. 특히 '반성'을 이야기 할 때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통상 기업 설명회의 메인은 실적이다. 실적을 두고 회사 경영진과 시장 관계자 등이 모여 질의 응답과 설명이 오가는 장(場)이다. 하지만 2분기 포스코 기업 설명회의 메인은 달랐다. 권 회장은 기업 설명회가 진행된 1시간 반 동안의 대부분을 '경영쇄신안 발표'에 할애했다.

 

 

권 회장의 발언 내용은 무척 강렬했다. 특히 "저를 포함한 모든 포스코 임직원들은 과거의 자만과 안이함을 버리고 새로 창업하는 자세로 돌아가겠다"는 말은 인상적이었다. 포스코는 지난 50여 년 가까이 국내 철강업계를 좌지우지해 왔다. 그런만큼 자부심도 강했지만 자만했던 것도 사실이다.

 

수십년간 불공정한 관행이 지속돼왔다. 포스코와 거래하는 수 많은 업체들은 포스코의 불합리에 대해 일언반구도 할 수 잆었다. 그만큼 포스코는 절대 '갑(甲)'이었다. 한 중소 철강업체 대표는 "감히 누가 포스코를 거스를 수 있겠냐"며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당장 밥줄이 끊기는 것보다 견디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권 회장의 '고해성사'는 이례적이다. 그동안 포스코가 공식적으로 스스로의 과오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어두운 부분을 스스로 들춰내고 고해성사를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놀랍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권 회장과 포스코가 이처럼 스스로 자세를 낮춘 까닭은 뭘까. 포스코는 지난 5월 경영쇄신위원회를 구성했다. 포스코는 국내 대기업 중 가장 윤리적이고 깨끗한 기업으로 알려져있었다. 하지만 검찰의 비리 수사로 숨겨졌던 사실이 하나 둘씩 드러나면서 포스코의 위상은 대내외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윤리'의 대명사였던 포스코가 알고보니 '비리의 온상'이었다는 대반전은 포스코에 대한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졌다. 포스코는 경영쇄신위원회를 통해 문제점 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도달한 결론이 바로 스스로를 낮추고 그동안 애써 무시해왔던 자만에 대해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이었다. 반성이 없으면 새로 출발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포스코 고위 관계자는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경영쇄신위원회에서 참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면서 "그 중 가장 마음을 후벼팠던 것은 그동안 포스코가 얼마나 거만하고 상황 인식에 안일했는지에 대해 반성할 때였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그것들을 반박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권 회장은 이번 경영쇄신안을 준비, 보고 받으면서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권 회장이 경영쇄신안 보고서를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며 "자칫 자기 반성을 통해 포스코 스스로의 치부를 인정하고 드러낸다면 조직의 사기가 저하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하지만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고 밝혔다.
 
결국 권 회장은 반성을 선택했다. 업계와 시장의 반응은 일단 긍정적이다. 포스코가 늦었지만 제대로된 길을 선택했다는 평가다. 기업설명회에 참석한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매우 신선했다"며 "도도했던 포스코가 결국 비리 수사와 신뢰도 하락에 직면하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고도 볼 수도 있지만 시도 자체는 무척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물론 권 회장의 고해성사와 경영쇄신안의 성공 여부는 별개다. 포스코가 야심차게 내놓은 고강도 쇄신안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권 회장의 말처럼 '뼈를 깎는 고통'이 있어야 한다. 50년 가까이 묵은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권 회장은 "저를 비롯한 포스코 경영진은 현재의 위기를 조속히 극복하고 다시는 유사한 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근본적이고 강력한 쇄신을 추진할 것"이라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변화시켜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는 2018년까지는 또 다른 반세기를 시작하는 기반을 공고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포스코에는 '우향우 정신'이 있다.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한 연설에서 “제철소 건설이 실패하면 우린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만큼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에 투신해야 한다”라고 말 한것에서 유래한다. 절박함을 강조한 것이다.
 
포스코는 이제 다시 '우향우 정신'을 발휘해야 할 때가 왔다. 제철소 건설이 아닌 '쇄신에 실패하면'으로 조건이 바뀌었다. 권 회장과 포스코의 고해성사가 진심어린 절박함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위기 모면용이었는지는 시간이 증명할 것이다. 이제 공은 다시 권 회장과 포스코에게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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