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 숭례문 앞에 1984년 10월 준공돼 전신인 동방생명 때부터 명맥을 이어온 삼성생명 빌딩이 지금껏 걸었던 간판을 떼고 새 이름을 내단 것.
과거 서울시민들이 많이 찾는 '동방프라자'로 이름이 난 이 빌딩은 연면적 8만7682㎡, 지하 5층~지상 25층 규모다. 조선 시대 엽전을 제조하던 '주조청' 자리로 금융산업에 상징성이 있던 데다, 무채색 직사각형이 주를 이룬 주변 빌딩들과 달리 붉은 화강암의 타원형 구조여서 더욱 도드라진 태평로의 랜드마크였다.
이 빌딩 꼭대기에 새로 달린 간판은 '부영 사랑으로'. 이 회사가 고집하는 특유의 원앙 브랜드 로고(BI)도 함께였다. 바로 뒤편에 사옥을 가지고 있는 부영은 지난 8월31일 마지막 잔금을 치른 뒤 이튿날 간판부터 새로 달았다. 이중근 부영 회장이 "우리도 큰 길 앞으로 나가보자"며 이 빌딩에 5750억원을 베팅한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것이다.
▲ 신한은행 본점과 삼성그룹 태평로 사옥 사이, 지난 1일 간판을 갈아 단 서울 태평로 '부영 사랑으로 빌딩'(옛 삼성생명 빌딩)./이명근 기자 qwe123@ |
◇ '큰 손'의 등장
부영은 이보다 1주일 앞선 시점에도 시내 한복판 또 다른 삼성그룹 부동산을 사는 데 가장 센 패를 던졌다. 8월23일 을지로 입구 랜드마크 건물인 삼성화재 본사사옥 매입을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것. 부영은 4400억원 안팎의 인수가격을 써낸 것으로 전해진다. 이까지 포함하면 부영이 지난 1년간 사들인 부동산은 1조5000억원을 훌쩍 넘는다.
지난해 10월 인천 송도 대우자동차판매 부지를 3150억원에 인수한 것을 비롯해 올 들어 강원 태백 오투리조트(782억원), 경기 안성 마에스트로컨트리클럽(900억원), 제주더 클래식컨트리클럽&리조트(380억원) 등이 최근 인수 리스트에 오른다. 2012년에는 경영난에 처한 삼환기업이 내놓은 소공동 주차장 부지를 호텔을 짓겠다며 1721억원에 사들이기도 했다.
임대주택 사업을 주력으로 삼던 부영이 부동산 및 관련 인수합병(M&A) 시장의 '큰 손'으로 떠오른 것은 2009년 무렵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부동산 시장이 급격히 침체되던 때다. 부영은 서울시로부터 성동구 성수동 뚝섬상업용지 4구역을 3700억원에 낙찰받으며 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부지는 지상 49층 호텔과 주상복합을 지을 수 있는 1만9002㎡ 넓이의 땅이다. 바로 옆에는 한 채 값이 30억~40억원인 고급·고층 주상복합 '갤러리아 포레'가 서있다. 2005년 P&D홀딩스라는 시행사가 4440억원에 낙찰받았지만 잔금을 치르지 못해 2007년 계약이 해지됐고, 재차 입찰에 오른 것을 부영이 꿀꺽 삼켰다.
▲ 그래픽/유상연 기자 prtsy201@ |
부영은 이어 2011년에는 대한전선으로부터 무주리조트를 인수했고, 금호산업이 채권단 관리에 들어가며 중단됐던 제주국제컨벤션센터 호텔 사업도 인수했다. 다른 건설사들이 택지 확보에 소극적이던 때였지만 한국토지주택공사(LH)로부터 9000억원어치가 넘는 아파트 부지를 사들이기도 했다.
영역이 부동산 분야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제4 이동통신사 사업자 선정', '프로야구 제10 구단 설립', '종합일간지 인수' 등 각종 신사업 기회 때마다 부영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금융위기 이후 전반적으로 경기가 위축됐지만 부영은 오히려 이때부터 공격적으로 사업 확장과 인수·합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며 "지금까지도 쌓이는 돈을 주체할 수 없어 보일 정도로 매물만 나오면 달려들고 있다"고 말했다.
◇ 손 커진 배경은
부영은 주택도시기금(옛 국민주택기금)을 사업 재원으로 삼아 민간건설 공공임대 사업으로 성장한 건설사다. 다른 주택전문 건설사들이 2~3년 내 이익을 회수할 수 있는 '분양' 방식 위주로 사업을 벌였지만, 부영은 5년·10년의 임대기간을 둬 이익 실현을 늦추는 대신 기금을 통한 안정적 재원조달을 택했다.
부영이 유독 임대주택사업에 집중한 것은 창업자인 이중근 회장의 '세발자전거론'으로 설명된다. 당장 큰 수익을 거두기 어렵지만 리스크는 적은 임대주택사업이, 빨리 달리진 못해도 넘어지지 않는 세발자전거와 같다는 데서 나온 표현이다.
부영은 전신인 삼진엔지니어링 때였던 1983년부터 주택건설업과 주택임대업을 주요사업으로 삼아 지금까지 335개 단지, 26만가구 이상의 주택공급 실적을 올리고 있다. 준공한 사업만 303개 단지, 23만3197가구에 이른다. 이 가운데 234개 단지, 19만2977가구가 임대일 정도로 임대사업 비중이 높다.
특히 이 건설사는 공공임대주택 공급이 본격화된 1995년이후 2004년까지 외환위기 시기(1997·1998년) 두 해를 제외하고 매해 1만가구 넘는 임대주택을 공급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다른 업체들이 유동성 압박으로 고생하던 시기, 부영은 대량의 임대주택을 분양전환하며 이익 규모를 키울 수 있었던 이유다.
더군다나 민간건설 공공임대는 건설사업자금을 주택기금에서 연 2~3%대 저리로 융자받는 데다, 택지를 분양 아파트 용지에 비해 싸게 공급받을 수 있다. 건축비도 분양 주택에 비해 덜 든다. 그러나 의무임대기간 뒤 분양 전환할 땐 시세에 연동한 감정가로 팔 수 있다. 이는 부영이 사업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투자에 공격적인 것도 막대한 이익을 유보할 경우 부과될 세금 때문이라는 관측도 있다.
▲ 부영그룹 재무 개요 및 공급주택 수(자료: 부영) |
2009년 부영그룹은 지배기업인 부영에서 물적분할을 통해, 주택사업과 해외사업 부문을 부영주택으로 떼내는 방식으로 지배구조를 개편했다. 이외에 동광주택산업, 동광주택, 광영토건, 무주덕유산리조트 등을 국내 계열사로 두고 있고, 해외에는 부영VINA, 부영크메르, 부영크메르II, 부영크메르뱅크, 부영라오, 부영라오뱅크, 부영아메리카 등의 계열사를 운영중이다.
레저, 금융에 해외사업까지로의 사업영역 확대가 계열사 구성에서 엿보인다. 최근에는 임대주택 분양 전환 과정에서 입주자들과의 분양가 등을 두고 마찰 문제가 생기면서 종전에 비해 임대보다 분양 방식 사업비중을 높이고 있다. 또 정부의 기업형 임대주택(뉴스테이) 사업 진출도 추진중이다.
부영그룹은 올해 공정거래위원회 기준 자산 20조4344억원, 자기자본 7조280억원, 부채비율 190%, 매출 2조201억원으로 재계순위 13위(민간기업 기준)에 오른 대기업 집단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