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트진로의 일품진로는 긴 숙성 기간(10년)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은 술이다. 일품진로가 처음 출시된 것은 2006년인데, 이는 적어도 1997년엔 누군가 오크통에 소주를 담갔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일품진로 출시 10년 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회사 관계자들이 드문드문 기억해낸 일품진로 '출생의 비밀'은 이렇다. 1990년대 고급 소주의 시초를 열었던 술이 회사의 파산 위기 탓에 악성재고로 전락했고, 회사 주인이 바뀐 뒤 명주(名酒)가 됐다. 회사 관계자는 "우연이 빚은 술"이라고 표현했다.
▲ 1990년대 참나무통맑은소주 지면광고 |
일품진로 이야기는 1996년부터 시작된다. 당시 소주시장엔 프리미엄(고급) 바람이 불었다. 김삿갓, 곰바우, 청산리벽계수 등 고가의 소주가 잇따라 출시됐다. 프리미엄 소주 시장의 승자는 진로의 참나무통 맑은소주였다. 쌀로 만든 증류식소주를 1년 이상 참나무통에서 숙성한 이 술은 일명 '위스키 소주'로 불렸다. 일품진로와 숙성기간만 차이 날뿐 제조법이 똑 같은 것이다.
1년 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면서 모든 것이 뒤 바뀐다. 진로는 1997년 부도 직전에 몰리며 법원에 화의(和議)를 신청했다. '두꺼비 신화'를 일구며 한때 재계 20위권까지 올랐던 기업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프리미엄 소주 시장도 경제위기 여파를 피할 수 없었다. 참나무통 맑은소주 역시 단종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남은 오크통은 골칫거리가 됐다. 이천 공장 한켠을 차지한 수천개의 오크통은 회사 입장에선 처치 곤란한 악성재고였다. 간혹 회사 창립기념일에 오크통 원액을 사용해 기념주를 만드는 것이 전부였다. 수년간 담근 술을 버릴 수도 없었다. 오크통에 든 소주는 속수무책으로 한 두 살 씩 나이를 먹어갔다.
▲ 2010년 일품진로 광고 |
2005년 국내 주류시장에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하이트맥주가 진로를 전격적으로 인수·합병(M&A)한 것이다. 소·폭(소주맥주폭탄) M&A로 불리며, 국내 주류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두 회사는 하이트진로로 합쳐졌고, 진로의 골칫거리였던 오크통도 하이트진로로 넘어갔다.
창고에 쌓인 오크통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던 하이트진로는 2007년 일품진로를 출시했다. 어떻게든 재고를 처분해보자는 심정이었지만, 품질만은 인정받았다. 시장 출시되기 전 일품진로는 3개월가량 삼성에 납품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첫 반응은 미지근했다. 위스키같이 색이 노랗고, 알코올 도수가 높은 소주를 찾는 이는 많지 않았다. 거기다 일품진로 출고가는 9400원으로 일반 소주보다 10배가량 비쌌다.
하지만 애주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반응은 뜨거워졌다. 2013년 8만병에 불과하던 일품진로 판매량은 올해 상반기에만 30만병이 팔렸다. 패키지를 두 차례 바꾸고, 알코올 도수도 소비자 입맛에 맞춰 30도-23도-25로 조정한 점도 한몫했다. 한때 악성재고였던 이 술은 이제 없어서 못 파는 술이 된 것이다.
▲ 2013년 일품진로 광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