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컬리의 자기소개서가 변했습니다. 컬리는 스스로를 '일상 장보기 앱'이라고 소개해 왔는데요. 지난달부터는 '리테일테크 기업'이라는 머리말이 대신 붙기 시작했습니다. 리테일 테크는 '소매'를 뜻하는 '리테일(Retail)'과 '기술(Technology)'이 결합된 용어입니다. 우리가 종종 보게 되는 무인 편의점, 로봇카페 등이 리테일테크의 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컬리가 리테일테크 기업을 표방하기 시작할 무렵 물류 자회사의 이름을 '넥스트마일'로 바꿉니다. 물류센터에 투자를 늘리면서 제3자물류(3PL) 사업을 확대하겠다고 선언했죠. 기술 신사업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주문 대응 역량과 물류 시스템을 상품화해 기업간거래(B2B) 시장에서 파는 것이 골자입니다. 단순한 이커머스 플랫폼을 넘어, IT기업으로 변신하고 싶어하는 컬리의 의지가 느껴집니다.
기술을 강조하는 것은 컬리만의 일이 아닙니다. 주요 유통기업 대부분이 리테일테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개발(R&D)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각 기업의 시스템통합(SI) 계열사가 담당합니다. 롯데는 롯데정보통신, 신세계·현대백화점은 신세계아이앤씨와 현대IT&E를 계열사로 두고 있죠. SI계열사는 원래 그룹 내 IT시스템 구축·운영을 담당해 왔습니다. 반면 최근 들어서는 신사업의 주축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롯데정보통신은 지난해 7월 메타버스 기업 칼리버스를 인수했습니다. 지난 1월에는 롯데 사상 최초로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에 참석하기도 했고요. 롯데정보통신은 롯데쇼핑의 통합 쇼핑몰 롯데온(ON)의 고도화나 롯데홈쇼핑의 대체불가능토큰(NFT) 사업 등에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롯데가 메타버스 등을 그룹의 신성장동력으로 점찍은 것을 고려하면 더 많은 분야에서 활약이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신세계아이앤씨는 오프라인 매장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마트24 무인매장과 CU의 주류 자판기를 만든 것이 대표적이죠. 무인 매장은 갈수록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제 QR코드만 찍으면, 담배·주류 등 성인만 구매할 수 있는 상품도 구매할 수 있죠. 신세계아이앤씨는 지난해 말 전기차 충전 사업에도 진출하는 등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현대IT&E는 지난해 개장한 더현대서울의 무인 라이프스타일 매장 '언커먼스토어' 개발을 도맡으며 존재감을 드러냈죠.
이커머스는 어떨까요. 많은 플랫폼들이 컬리와 비슷하게 유통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쿠팡은 오래 전부터 스스로를 '테크 기업'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SSG닷컴도 IT기술이 집약된 자동화 무인센터 '네오'를 핵심 경쟁력으로 소개하고 있고요. 최근 들어서는 스토리가 담긴 영상을 통해 상품을 판매하는 라이브·미디어커머스에 관심을 가지는 플랫폼도 늘고 있습니다.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기술로 상품을 미리 체험해 보는 기술은 이미 일상에 자리잡았죠.
유통 기업이 왜 테크에 집중하는 걸까요. 코로나19에 따른 온라인 시장 성장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코로나19 첫 해였던 2020년 온라인 유통 시장은 전년 대비 18.4% 급성장했습니다. 다만 그 이전에도 유통 시장에서 온라인 유통의 비중은 42%에 달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상권이 온라인으로 옮겨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불특정 다수 소비자를 공략해야 하는 유통업계는 당연히 이 상권을 공략해야 하죠. 유통과 IT의 결합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시장의 변화는 더욱 빨라지고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이를 '유통 4.0'이라고 말합니다. 매장의 물리적 확장을 의미하는 1.0·2.0, 인터넷·PC·모바일 시장이 확장되는 3.0 시대를 지나 새로운 장이 열린다는 이론입니다. 유통 4.0 산업 모델에는 유통에 인공지능·사물인터넷·빅데이터·AR·VR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적용됩니다. 개개인에게 최적화된 쇼핑이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구현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습니다.
이것이 유통기업이 리테일테크에 힘을 쏟는 이유입니다. 많이 팔기만 하면 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커머스의 성장도 정체되고 있고요. 앞으로는 다양한 고객 경험을 제공할 수 있어야 승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기술을 통한 주문처리·큐레이션·물류 등 '배후 시스템'의 고도화가 중요해집니다. 경험과 실제 상품을 전달하는 프로세스가 원활히 작동해야 하니까요. 리테일테크에 강점을 가진 기업이 앞으로의 시장을 선점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리테일테크의 미래는 아직 모릅니다. 기술력을 강조하는 기업·플랫폼 대부분이 '모델'만 내놓았을 뿐 '수익성'을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키오스크 보급 초기처럼 전통적 구조에 익숙한 소비자가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일각에서는 리테일테크가 요란한 표어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구체적 계획 대신 거대하지만 막연한 비전을 앞세워 차별화를 '연기'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그럼에도 리테일테크가 우리의 일상을 많은 면에서 바꿔 놓을 것은 분명합니다. 앱을 켜기만 해도 원하는 상품을 알아서 보여주는 플랫폼이 머지않아 등장할겁니다. AI가 적용된 물류센터는 물류 효율성을 더욱 높이고 비용 혁신을 불러오겠죠. 이 모든 변화는 소비자가 느끼는 편리함을 한층 더 끌어올릴 겁니다. 우리가 앞으로 만나게 될 유통 산업은 어떤 모습일까요. 마음 편히 즐기다 보면, 가까운 미래에 곧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