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의 냉장고 속 풍경이 바뀌고 있다. 케첩, 마요네즈 옆에는 '고추장'이 놓여 있고 피클의 자리는 '김치'가 대신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한인마트에서나 볼 수 있던 김치는 이제 월마트, 코스트코, 타깃 등 주류 유통매장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이런 변화의 최전선에 대상이 있다.
대상 미국법인인 대상아메리카는 1994년 설립됐다. 오랜 기간 한인 교민 시장을 중심으로 사업을 해오며 기회를 엿보던 대상은 2015년쯤 마침내 미국 주류 채널 공략을 본격화 했다. 이때만 해도 주류 채널의 매출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10년이 흐른 현재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현재는 오히려 주류 채널의 매출이 교민 채널보다 더 높다. 한인 사회뿐만 아니라 미국의 다른 소비자들도 K푸드를 즐기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지난 15일(현지시간) 박용운 대상아메리카 대표를 만나 대상의 미국 공략기와 K푸드의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진짜 'K김치'
대상아메리카는 매출 중 절반 가까이는 당연히 '종가' 김치에서 나온다. 이 김치 매출의 상당 부분은 월마트·코스트코 같은 주류 채널이 담당하고 있다. 대상아메리카의 주류 채널 매출은 최근 5년간 연평균 70% 이상의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김치가 이 성장을 주도 하고 있다.
실제로 대형 유통채널을 방문하면 김치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박 대표는 "코스트코 같은 대형 유통채널에서는 김치를 집어가는 다양한 소비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며 "김치를 찾는 백인, 히스패닉, 아시아계 소비자들의 수가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히스패닉은 대상아메리카의 핵심 타깃이다. 박 대표는 "히스패닉이 우리나라와 먹는 게 비슷해 김치를 친숙하게 느낀다"고 설명했다.
최근 미국 주류 채널에서는 '진짜 한국 김치'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과거에는 김치를 먹어본 경험이 없거나 김치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미국 소비자들이 많아 이들의 입맛에 맞춘 김치를 찾는 바이어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박 대표는 "한국 제품을 어설프게 미국식으로 바꾸면 맛이 없어지니 차라리 더 한국적인 제품을 달라는 바이어들이 많다"고 밝혔다.
대상아메리카가 김치의 대표격인 배추김치만 고수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아메리카는 히스패닉, 아시안계 등 다양한 소비자들의 입맛을 겨냥해 오이김치, 할라피뇨김치, 청경채김치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김치를 선보이고 있다. 우리가 다양한 채소를 김치로 만들어 먹는 것과 비슷하다.
특히 지난 1월 코스트코 전용 제품으로 출시된 오이김치의 인기가 뜨겁다. 오이는 미국인들에게도 친숙한 채소다. 피클로도 자주 즐긴다. 오이김치는 피클과 비슷해 김치의 '입문용' 제품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 대표는 "오이김치는 올해 말까지 단일 채널, 단일 품목 기준 출시 첫 해 최대 성과를 낼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미국 회사도 만드는 김치
그렇다면 현재 미국 김치 시장 규모는 얼마나 될까. 박 대표는 "미국 김치 리테일 시장 규모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국에서 수입되는 제품, 중국에서 수입되는 제품, 미국 현지에서 생산하는 제품까지 다 합치면 연간 약 8000억원 규모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전 세계 김치 시장 규모가 약 6조원 가량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김치 시장이 커지면서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한국 기업들뿐 아니라 미국 현지 업체들도 김치 시장에 뛰어들고 있어서다. 박 대표는 "월마트, 타깃, 홀푸드 같은 주류 매장에 가면 김치 비슷한 제품들이 많다"고 말했다.
미국 피클 1위 기업 클리블랜드 키친(Cleveland Kitchen), 미국 발효식품 기업 와일드브라인(Wildbrine) 같은 업체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원래 사우어크라우트나 피클을 만들던 회사들이다. 현재는 '김치 피클'이나 '마일드 화이트 김치'와 같은 제품을 판매 중이다.
박 대표는 "이 업체들이 양배추에 고추를 넣고 마늘을 넣어서 김치 형태로 만든다"며 "딱 김치라고 표기는 안 돼 있어도 김치와 비슷한 제품들이 5~6년 사이에 많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김치가 미국 주류채널에서 일상적으로 판매되는 제품이 됐다는 의미다. 그는 "김치 비슷한 제품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발효 김치 본연의 맛과 식감은 다르다"며 "종가 김치는 전통 발효 방식으로 만들어 아삭한 식감과 깊은 맛을 구현한다"고 강조했다.
맛의 차이 덕분에 대상아메리카는 미국 김치 소매 시장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 박 대표는 "정확한 시장 점유율을 산정하기는 어렵지만 코스트코를 포함한 리테일 시장에서 우리가 약 45% 정도를 차지한다고 본다"고 밝혔다. 대상은 2023년 '서울김치'를 운영하는 미국 동부의 럭키푸드를 인수하면서 시장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그는 "종가와 서울김치를 합치면 미국 리테일 김치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K핫소스의 진격
K푸드의 인기는 김치에만 그치지 않는다. 대상아메리카가 김치 다음으로 주목하는 상품은 '고추장'이다. 김치 다음으로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는 효자 품목이다. 고추장은 대상이 2015년 미국 주류 채널 공략에 나서던 시기 가장 먼저 선보인 품목이기도 하다.
고추장은 미국에서 '핫소스'로 분류된다. 미국 가정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소스가 바로 핫소스다. 핫소스에는 타바스코, 스리라차 등이 포함된다. 최근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핫소스는 고추장이다. 박 대표는 "타바스코나 스리라차는 그대로 먹으면 맛이 없지만 고추장은 다르다"며 "고추장의 발효 과정에서 감칠맛이 나고 '단짠'의 맛이 균형을 이룬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미국 내에서 고추장의 인기는 높아지고 있다. 미국 대형 캐주얼 다이닝 체인, 식품 대기업 등에서도 대상 고추장을 활용한 메뉴와 제품을 선보일 정도다. 박 대표는 "사람들은 새로운 소스를 마트에서 바로 사기보다는 레스토랑에서 먹어본 후 구매한다"며 "고추장도 외식업체에서 경험한 사람들이 마트에서 사게 된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변화도 있다. 대상아메리카는 2015년 텍사스 지역 유통채널 '센트럴마켓'에 입점할 당시 케첩처럼 드레싱으로 뿌려 먹을 수 있는 튜브형 고추장을 선보였다. 고추장이 되직해서 요리하기 불편하다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고추장 그대로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그는 "2~3년 전만 해도 주류 채널에 한국에서 판매되는 사각용기 고추장을 갖다놓으면 팔리지 않았다"며 "하지만 지금은 사각형 대용량 제품을 찾는 소비자가 생기면서 코스트코, 월마트, 알버슨 등에서 납품하고 있다"고 밝혔다.
제2의 김치가 나올 때까지
대상아메리카는 내년 매출 목표를 올해보다 약 20% 높게 잡았다. 박 대표는 "미국 경기가 불확실하고 관세 이슈가 있기 때문에 다소 보수적으로 잡은 목표"라며 "김치와 고추장 수요가 커지고 있는 만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물론 앞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가장 큰 변수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다. 대상은 대상아메리카를 통해 일부 제품을 미국 현지에서 생산하고 있지만 많은 제품을 한국에서 수출하고 있다. 그는 "한미FTA로 원래 관세가 0%였다가 갑자기 15%, 25%를 부담하는 것은 감당하기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캘리포니아의 사업 환경 악화도 고민거리다. 높은 세금과 규제, 치솟는 인건비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텍사스나 조지아로 이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상아메리카는 미국 시장의 미래를 낙관한다. 미국의 인구구조 변화 때문이다. 미국 내 젊은 세대 인구는 비히스패닉 백인 비율이 점점 낮아지는 반면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소비자가 늘어나고 있다. 20년 뒤에는 전체 인구에서 백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50%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히스패닉과 아시아계가 K푸드의 주요 소비층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추후 K푸드의 성장세는 더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박 대표는 "현재 김치 성장세도 높지만 인구 구조 변화를 보면 앞으로 10년, 20년은 더 기대가 된다"고 밝혔다.
대상아메리카의 목표는 단순히 매출 성장에만 있지 않다. 한국을 대표하는 식품 기업으로서 K푸드를 더욱 알리는 역할도 수행한다는 사명감도 갖고 있다. 그는 "한류 덕분에 우리 제품들이 많이 뜨긴 했다"면서도 "단순히 한류의 덕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류를 선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역설했다.
대상아메리카는 앞으로도 미국 주류 채널을 대상으로 공격적인 영업과 마케팅 활동을 펼치는 한편 신제품과 R&D에도 투자를 지속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당장은 김치와 고추장을 내세우겠지만 앞으로 제2, 제3의 김치와 고추장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