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상한 표현이지만 '명암이 엇갈렸다'는 말만큼 올해 식품업계를 잘 설명해 주는 문구도 없다. 올해 식품업계는 말 그대로 '명암이 엇갈렸다'. 내수에 무게를 둔 기업들이 불황 여파에 여지없이 무너진 반면 일찌감치 해외 시장을 겨냥했던 기업들은 K푸드 열풍을 타고 승승장구했다. 이에 따라 그간 내수 중심 운영을 해 왔던 기업들도 해외 공략을 천명하기 시작했다.
올릴 수도, 안 올릴 수도 없다
올해 국내 소비업계의 트렌드는 '눈치보기'였다. 계엄 사태 이후 새로 들어선 이재명 정부는 초기부터 물가 단속에 나섰다. '2000원 라면' 발언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이 직접 특정 제품군의 가격을 지목하며 '비싸다'는 시그널을 보냈다. 9월엔 "식료품 물가만 유독 많이 오르는 이유를 철저히 규명하라"고도 했다.
가격 인상 대신 용량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도 막혔다.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지난 10월 국민들이 치킨 가격은 그대로인데 양은 줄었다고 느낀다며 치킨업계의 슈링크플레이션을 직접 비판했다. 이후 정부는 치킨업계에 '조리 전 중량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슈링크플레이션이 문제됐던 제과업계, 빙과업계 등도 예의주시 중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 초까지 가격 인상 행진을 벌이던 식품업계는 몸을 사리고 있다.
문제는 외부 사정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고환율과 치솟는 원재료 가격 때문에 식품 기업들의 원가율은 우상향하고 있다. 올해 연평균 환율은 1422.63원으로 지난해 1366.63원보다 4% 넘게 올랐다. 카카오, 버터, 유지원유 등 주요 원재료 가격도 급상승했다. 롯데웰푸드의 경우 3분기 누적 매출원가율이 지난해 69.4%에서 올해 71.9%로 치솟았다. 카카오 가격이 배 가까이 뛰었고 유제품류 가격도 20% 이상 오른 영향이다.
더 큰 문제는 내년 이후다. 식품위생법 개정안에 따르면 내년 말부터 대두와 옥수수를 시작으로 유전자변형식품(GMO) 완전표시제가 시행된다. 대두와 옥수수는 거의 모든 식품 기업들이 주 원재료로 사용하는 품목이다. 가격이 비싼 Non-GMO 원재료 수요가 늘면서 원가 압박이 더 거세질 저망이다.
K푸드 안 드신 분?
어수선한 국내와 달리, 해외 시장에선 승승장구한 한 해였다. 한 철 유행인가 싶었던 K푸드는 이제 2020년대를 관통하는 글로벌 키워드로 자리잡았다. '한국'이 붙어있는 음식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팔려나갔다. '라면의 원조' 일본 닛신식품이 한국 라면을 베낀 '한국 스타일 라면'을 내놓고 있을 정도다.
그 중심엔 라면과 삼양식품이 있다. 3분기까지 누적 매출 1조7141억원을 올렸다. 이 중 80%가 넘는 1조3747억원이 해외 매출이다. 연말까지 해외에서만 2조원 가까운 매출을 기록할 전망이다. 불닭볶음면이 튼 수출길은 농심이 '신라면 툼바'와 '케데헌 신라면'으로 이어받았다. 올해 최대 히트작인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손잡고 빠르게 시장을 확대했다. 업계에선 농심의 올해 해외 매출이 1조원에 다다를 것으로 전망한다.
CJ제일제당도 만두와 길거리 음식을 앞세워 'K푸드 신영토 확장' 프로젝트의 성과를 이어갔다. 지난해부터 유럽 전역에 사업 확장을 추진, 진출국을 27개로 늘렸다. 삼양식품과 농심의 활약에도 해외 진출 확대에 미온적이었던 오뚜기도 올해엔 미국에서 565억원을 들여 캘리포니아 라미라다 지역에 생산공장 설립을 추진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외국인들에게 '검은 종이' 취급받던 김도 라면에 이은 국가대표 K푸드로 거듭나고 있다. 올해 3분기까지 8억8238만 달러어치를 수출하며 라면에 이은 식품 수출 2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라면에 이어 연간 10억 달러 수출이 확실시된다.
특히 그동안 일본이나 중국, 태국 등 원래 김을 먹던 아시아 지역 수출이 많았던 것과 달리, 최근엔 미국과 러시아 등 서양권 수출이 늘고 있다. 지난해 김 수출 1위국 역시 미국이었다. 채식·다이어트·친환경 트렌드에 부합하는 음식이라는 인식이 K푸드의 인기와 결합되며 때아닌 '김밥' 열풍이 분 덕이다.
NEXT K푸드
식품업계는 이제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 바로 '소스' 시장 공략이다. 외식이나 간편식이 아닌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한식 시장을 키우기 위해서다. 외식이나 대형마트 등을 통해 K푸드를 접했다면 다음 단계는 '요리'다. 한식의 필수 재료인 고추장과 된장은 물론 각 식품 기업들이 갖고 있는 '킥'을 소스화해 K푸드의 일상화를 이끌겠다는 계획이다.
삼양식품은 앞서 글로벌 프랜차이즈인 졸리비, 판다익스프레스, 버거킹 등과 손잡고 대표 제품인 불닭볶음면의 매운 소스를 활용한 메뉴를 선보였다. 기본 불닭소스는 물론 크리미한 까르보불닭소스, 불닭마요, 불닭스리라차, 불닭치폴레마요 등 다양한 소스와 결합한 불닭 소스를 내놨다. 지난 10월엔 소스 제조사 지앤에프를 인수하고 사명을 '삼양스파이스'로 변경했다.
백종원 대표가 이끄는 더본코리아도 글로벌 소스 시장 공략을 위해 팔을 걷어부쳤다. 9월 소스 브랜드 'TBK'를 론칭하고 B2B 시장 공략을 천명했다. 양념치킨 소스, 볶음 소스, 된장찌개 소스 등 대표 K푸드 소스를 선보여 현지에서도 손쉽게 한식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내년에도 식품업계의 '외강내유'는 계속될 전망이다. 내년엔 지방선거 이슈가 있다. 기업들이 섣불리 가격 인상에 나서기엔 보는 눈이 많다. 내수 활성화 역시 아직 단초가 보이지 않는다. 허리띠를 또 한 칸 더 졸라매야 하는 한 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다행히 K푸드 열풍 역시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식이나 중식과는 또 다른 한식만의 매력이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다. 글로벌 푸드 트렌드인 '채식'과 '헬시 플레저'는 한식의 인기를 더 가속화하고 있다. 라면과 만두 등 가공식으로 시작된 K푸드 열풍은 최근 들어 찌개, 나물 등 일상식으로 넘어오고 있다. 국내 식품 기업들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처럼 내수와 해외 시장의 불균형이 심한 때는 없었을 것"이라며 "해외에서 벌어서 국내에서 쓰는 추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