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이 장고 끝에 초강수를 뒀다.
최 원장은 자문기구인 제재심의위원회의 결정을 뒤집고, 임영록 KB금융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에 대한 중징계를 확정했다. KB금융의 내분사태가 수습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는 판단에 사실상 두 사람 모두에게 레드카드를 꺼낸 셈이다.
후폭풍도 거셀 전망이다. 우선 KB금융은 당장 그룹의 1, 2인자가 모두 물러날 수도 있는 초유의 경영공백 사태가 예상된다. 금감원 역시 제재심의 결정을 스스로 뒤집으면서 제재기구 독립을 비롯한 역풍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 임영록 회장, 이건호 행장 모두 중징계
금감원은 4일 임 회장과 이 행장에게 나란히 문책경고를 확정했다. 임 회장은 국민은행 주전산기 교체를 강행하려는 의도로 국민은행 임원 인사에 부당하게 개입했다고 지적했다. 이 행장에겐 이 과정에서 국민은행에 대한 총체적인 내부통제 부실과 함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책임을 물었다.
금감원에 따르면 KB금융지주 경영진은 국민은행 주전산기의 유닉스 전환을 무리하게 추진했다. 유닉스 전환시 발생할 수 있는 시스템 리스크를 고의로 은폐하고, 허위 사실을 경영협의회와 이사회에 보고하도록 국민은행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
금감원은 임 회장 외에 김재열 전무를 비롯해 KB금융지주 임직원 4명과 국민은행 임직원 16명에 대해서도 정직을 비롯한 징계 수위를 확정했다. KB금융지주와 국민은행엔 기관경고를 내렸다. 이 행장에 대한 중징계는 곧바로 확정되며, 임 회장은 지주회사법에 따라 금융위원회 의결을 거쳐서 확정될 예정이다.
최 원장은 "임 회장과 이 행장은 직무상 감독의무를 현저히 태만히 함으로써 심각한 내부통제 위반행위를 초래했다"면서 "그런데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최고경영자로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 KB금융 내분 악화하면서 중징계 명분 얻어
금감원은 애초 두 사람 모두에게 중징계를 통보했다. 하지만 자문기구인 제재심이 지난달 21일 징계 수위를 경징계로 낮추면서 최종 결정권자인 최 원장은 이를 수용할지, 아니면 거부권을 행사할 지 고심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재심의 결정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최 원장이 어쩔 수 없이 이 결정을 받아들일 것이란 관측이 일반적이었다. 제재심이 자문기구이긴 하지만 그동안 제재심의 결정을 번복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재심 직후 검찰 고발과 템플스테이 소동 등으로 KB금융 내분사태가 오히려 더 악화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KB금융 사태를 방치해선 안된다는 지적과 함께, 정치권과 노동계에선 두 사람의 동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면서 최 원장도 KB금융의 조기 안정을 위해선 중징계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금융노조와 만난 자리에서 KB금융 사태의 해결을 시사했다는 점에서 최 부총리와의 교감설도 나오고 있다.
◇ KB금융은 물론 금감원도 거센 후폭풍
최 원장이 KB금융 1, 2인자에게 나란히 중징계를 내리면서 후폭풍이 거셀 전망이다. 문책경고는 직무정지나 해임권고와 달리 당장 물러나야 한다는 강제 규정은 없지만 사실상 레드카드에 해당한다. 과거 문책경고를 받은 최고경영자(CEO)는 대부분 스스로 물러났다.
그러면 KB금융은 그룹 1, 2인자가 모두 옷을 벗는 사상 초유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최근 몇 달간 내부갈등으로 시끄러웠던 KB금융이 아예 선장을 잃고 또 다시 몇 달을 보낼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금감원 역시 역풍이 예상된다. 최 원장이 자문기구인 제재심의 판단을 부정하면서 제재심의 존립 근거를 흔들어 버린 탓이다. 게다가 KB금융 제재 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한 일처리로 오히려 혼란을 부추겼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에 따라 현재 금감원의 자문기구로 있는 제재심을 아예 따로 떼내 독립기구화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최근 금융회사 직원에 대한 직접 제재 권한도 사실상 폐지된 상태여서 금감원의 제재 기능은 더 크게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