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가 급박하게 번지고 갈등을 해소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책임 있는 행동을 멀리하고 뒤에 숨어 있다가, 금융당국이 칼을 빼 들자 관치 운운하는 그야말로 낮은 수준을 보여줬다. ‘공익 대표’라는 탈을 쓴 채 주주와 직원, 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고민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들에게 다시 KB금융을 맡겨야 하는 상황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 “관치? 맞다.”
금융위원회의 임영록 회장 해임권고에 대해 이사회는 ‘관치 불가’라는 논리로 맞섰다. 언론은 금융감독당국 행정의 ‘오락가락, 엇박자’에 초점을 맞췄다. 사실 이번 KB금융 사태와 관련해 금융당국은 애초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잘못이었다. 진입하고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한마디로 창피한 상황을 자초했다.
관치 논란은 금융부문에서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필요악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시하기 힘든 측면도 있다. 관치는 분명히 척결해야 할 구습이지만, 시장 붕괴를 막는 마지막 보루로서 책임 단위는 어떤 식으로든 필요하다는 이유다. 그래서 관치는 금융시장과 금융시스템 붕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미국도 투자은행의 대표들을 사실상 감금(?)한 채 손실분담과 시장대책을 관철했다. 미국 항공산업과 자동차산업이 무너질 우려가 커지자 은행장들을 모아 놓고 지원할 것을 사실상 강요해 마찬가지로 성사시켰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구제금융이다. 산업과 가계의 파이프 라인인 금융시장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KB금융 경영분쟁 사태는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로 금융사고를 우려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금융당국이 진입해야 할 정도의 시스템 우려 상황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대형금융그룹이지만, 내부의 경영분쟁이었다. 그래서 이번 금융감독당국의 진입은 섣부른 진입이었다. 이로써 관치의 오명을 쓰는 것을 자초했다.
금융감독당국은 직접 진입하는 대신 경영진에게 충분히 경고하고 처음부터 이사회로 하여금 경영정상화 대책을 요구했어야 했다. 국민은행 감사의 감사요청이 무슨 전쟁 발발 시 자동개입 조항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감독당국은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KB경영진들이 던진 미끼를 넙죽 받아먹은 꼴이다.
미끼를 잘못 물어 진입했다면 신속히 불이라도 껐어야 했다. 두 가지 모두 감독당국으로서는 관치의 오명을 쓰기 딱 좋은 상황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없다. KB금융 이사들이 ‘관치’라고 해도 대꾸할 명분이 별도 없다는 얘기다.
이쯤에서 우리나라 관치금융의 대명사처럼 돼 있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의 어록을 하나 꺼내 보자.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 숭례문 화재 과잉 진압 논란이 있는데, 지금 당장 불을 꺼야 하는 상황에서 기왓장 몇 개 더 깨지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관이 진입했다면 가능한 빨리 불을 끄는 게 맞다.”(2008년 숭례문 화재 진압 논란이 한창일 때 한 기자단 오찬에서)
◊ KB금융 이사회는 무엇을 했는가?
이젠 KB금융 이사회를 되돌아볼 시간이다. 자초지정이야 어쨌든, 이건호 행장과 정병기 감사에 의해 문제가 제기됐을 때 적극적으로 사태를 바로잡았어야 했다. 이사회는 충분히 그럴만한 권한과 책임이 있다. 이사회를 통해 결정한 사항을 은행장과 감사가 억지로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미처 점검하지 못했던 사안이라면 겸허히 수용하면 될 일이다.
이를 KB금융 이사회는 은행 이사회에서의 분쟁을 개 닭 보듯 쳐다보진 않았던가? 은행장과 감사가 내부의 경영 판단 문제를 외부인 금융감독원으로 끌고 간 것과 관해서도 KB금융 이사들은 이미 비슷한 사례를 경험했었다. 어윤대 회장 시절 주총안건 분석기관(ISS)에 정보를 유출(?)했던 사건이다. 이에 KB금융 이사회는 얼마나 단호한 조치를 했던가?
왜 그때와 지금은 다른가? 은행장이 이사회의 결정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계속하면서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킨다면 은행장을 해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사회의 행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관치’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쓴 건 최근의 일이다.
제재심위원회의 권고안을 최수현 금감원장이 뒤집고, 다시 신제윤 금융위원장에 의해 ‘해임권고’ 상행 조정되자 그때서야 ‘관치’라는 말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만약 그들이 이번 문제가 정말로 ‘주식회사 KB금융’ 내부의 일을 과도하게 당국이 오버한 ‘관치’라고 생각했다면, 이 단어는 언론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입을 통해서 먼저 나왔어야 했다.
‘이번 문제는 내부 경영 과정에서의 의견 충돌인 점을 분명히 하고, KB금융 내부의 일이니 우리가 수습하겠다’고 발표했어야 했다. 그래야 지금 ‘관치’라는 비판이 지지를 받을 수 있다. 그때는 뒤에 숨어 있다가 지금 와서 이 단어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오지랖 넓은 사람들은 ‘어윤대 회장은 지는 해고, 이건호 행장은 새 정권에서 힘을 받고 있어 그런 것이 아니냐?’고 꼬집는다.
이사회에서 임 회장에 대한 해임결의를 통과시키는 과정도 마지못해 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이 그토록 경멸했던 ‘관치’에 굴복하는 순간이다. 마지막까지 해임을 반대한 이사들은 오히려 가슴 속에 묻어뒀던 말이라도 터뜨렸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다.
지난 19일 이사회에선 이들이 모두 포함된 회장추천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사회에서 당국의 관치 문제와 임 회장의 해임 불가를 강도 높게 외친 김영진 이사가 회추위 의장을 맡았다. 앞으로 5회 정도 회의를 열어 후보군을 압축하고 10월 말 최종 후보를 추천하겠다는 계획도 알렸다. 잘못된 금융 환경을 일갈했지만,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몫 찾기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어디에서도 ‘책임’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없다. 이사회와 갈등을 겪다 물러난 이건호 행장과 관련해 ‘학자적 지조(?)가 화(禍)를 키웠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사회 멤버의 상당수가 학자인 KB금융 이사회에선 완전히 다른 모습도 볼 수 있다. 이것이 KB금융 지배구조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