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금융의 아킬레스건은 지배구조다. 신한사태와 KB사태 등을 잇따라 겪으며 금융회사의 지배구조 이슈는 은행과 금융산업의 리스크로 부각했다. 이 과정에서 호시탐탐 손길을 뻗으려는 관치는 '설익은 지배구조'를 무력화시킨다. 금융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인이다. 최근 몇년새 지배구조법이 만들어지고 차기 경영승계프로그램, 이사회의 권력화 혹은 CEO 유착 등을 막기 위한 제도적인 손질도 있었다. 최근 금융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이슈들은 우리 금융산업의 지배구조가 미완이라는 점을 방증한다. 금융회사별로 지배구조 이슈를 점검하고 진단해본다. [편집자]
▲ 그래픽/유상연 기자 |
2014년 12월초 이광구 우리은행장 내정자의 집무실은 본점이 아닌 '시내 모처'였다. 당시 이순우 행장과는 같은 상업은행 출신으로 돈독한 선후배 관계로 알려졌지만 연임 대세론을 깨고 행장으로 내정되는 과정에서 둘 사이엔 금이 갔다. 이 행장은 공식 취임까지 한달 가까이 객지(?) 생활을 했다. 최근 사의표명을 한 이광구 행장은 또다시 본점이 아닌 '시내 모처'에서 대표이사로서 업무를 수행한다. 그간의 그의 성과에 비춰 씁쓸한 뒷모습이지만, 묘하게 오버랩되는 이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은행의 지배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케한다.
사실 CEO의 유고는 언제, 어느 기업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일 터. 문제는 이사회를 중심으로 한 내부 지배구조시스템이 CEO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새로운 지배체제를 안정적으로 정립할 수 있느냐에 있다. 지난 2010년 신한금융에서 있었던 신한사태는 이사회를 중심으로 결단력 있게 사태를 해결했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이사회가 대표이사 회장 직무대행을 세우고 특별위원회를 구성회 사태수습을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던 점은 인상적인 장면이다. 관련기사☞②신한금융 주주 "셋 다 나가라" 주인의 모습
반면 우리은행은 시작부터 삐걱대는 분위기다. 과점주주 지배구조가 채 안착하기도 전에 CEO리스크가 불거졌다. 여전히 단일 최대주주(18.52%)가 정부(예금보험공사)라는 점에서 갈등의 요인들이 잠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은행이 정부은행에서 민영은행으로 거듭나려는 시점에서 5명의 과점주주 사외이사들의 역할에 다시한번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우리은행 이사회는 지난 2일 이 행장의 사의 표명 이후 사흘만에 이사회를 열면서 차기 행장 인선에 속도를 내는듯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행장 선임 일정과 절차는 물론이고 주축이 될 임원후보추천위원회(이하 임추위) 구성도 하지 못했다.
오늘(9일) 이사회가 소집됐다. 이 행장이 사의표명한 지 일주일만에 임추위를 구성할 수 있을지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예보 측 비상임이사의 참여여부에 대해 정부와 과점주주들 간에 의견이 엇갈리면서,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도 일주일을 그냥 허송해버렸다. 관치와 과점주주 지배구조 취지 훼손에 대한 우려가 확산하면서 정부와 예보 역시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다.관련기사☞우리은행 임추위 구성부터 험난 '주주권 vs 관치'
그 사이 우리은행 주가는 1만6700원(1일 종가)에서 1만5650원(8일)으로 6% 넘게 급락했다. 금융권과 우리은행 안팎에선 차기 행장에 대해 각종 설들이 난무하면서 조직은 더욱 어수선해지는 분위기다. 현 정부와 인연이 있는 외부 인사부터 제각각 연줄을 과시하는 우리은행 출신의 올드보이들의 이름도 거론된다. 이같은 혼란은 결국 지금의 상황에선 이사회의 책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 정부 개입은 예견된 일?‥과점주주 역할 주목
지분구성만 놓고 보면 정부의 개입이 당연하다는 시각도 엄연히 존재한다. 다만 과점주주 매각 취지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금융권 한 고위관계자는 "정부가 민영화 이후 기존에 임기가 남은 사외이사를 모두 사퇴시키면서까지 과점주주 지배구조를 세팅했는데 이제와서 예보 측 이사를 임추위에 포함하는데 대한 명분이 없다"고 지적했다. 주주권한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주총에서 해당 안건을 부결시키거나 혹은 이를 전제로 사외이사를 압박하는 형태의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충분히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초 임추위에서 행장을 선임할 당시엔 정부가 철저히 임추위에 자율권을 부여하면서 과점주주 체제의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우리은행의 (지분구성상) 과도기적인 지배체제는 정부의 주주권 행사 시도 등의 갈등을 표출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관치로 흐를 수 있는 정부의 이런 움직임은 물론이고 이 과정에서 불거질 수 있는 집단지도체제의 허점에 대해 이사회와 과점주주 사외이사들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지배구조의 성패가 달려 있다. 정부은행의 색을 지우고, 향후 있을 정부 잔여지분 매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과점주주 지배구조는 다시한번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 행장 빼곤 사내이사 없어 경영공백 키워
이광구 행장의 사의 표명을 계기로 지배구조의 허점도 드러났다. 행장과 상근감사위원을 제외하곤 사내이사가 없어 경영공백 우려를 더욱 키우고 있다. 이 행장은 사의를 표명하고도 법령상 대표이사로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외의 일상적인 업무는 손태승 선임 부문장에게 넘기는 형태로 사실상의 직무대행을 맡는 이상한(?)구도가 펼쳐졌다.
과거 KB사태 당시에도 지주 회장이 사퇴했지만 사내이사가 없어 경영공백 우려를 키웠다. 당시 윤웅원 부사장(현재 국민카드 사장)이 이사회에서 직무대행으로 위촉되고, 법원에 대표 궐위에 따른 일시 이사 명령을 받아 대표이사 직무대행을 수행했다. 복잡한 절차는 물론이고 시일이 걸리는 사안이어서 경영공백이 불가피했다. 이런 이유로 은행권 지배구조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각 금융지주사들이 CEO 이외에도 사내이사를 두기 시작했다.
우리은행도 지난해까지 이동건 영업지원그룹장이 사내이사로 있었지만 이 그룹장의 퇴임 이후엔 별도로 사내이사를 두지 않았다. 은행 측은 민영화 과정에서 이사회 내 과점주주 사외이사에 힘을 싣기 위해 사내이사 수를 줄인 영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만 지금의 상황에선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이유야 어찌됐든 CEO 이외에 사내이사를 두지 않은 점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