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이 굵어 주판에 서툴러 전산실에 발령받은 서른살 늦깎이 은행 행원이 있었다. 그는 전산실에서 여신금융시스템을 프로그래밍하며 디지털이 금융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깨닫게 된다. 이후 영업 현장에서는 정보가 가진 영업효과도 체감한다. 디지털과 정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 금융의 미래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30여년 뒤 굴지의 금융그룹 수장이 됐다. 그리고 그룹의 미래를 위해 과감한 디지털 투자를 단행한다.
하나금융그룹 김정태 회장 이야기다.
김 회장과 하나금융그룹 계열사 경영진은 지난 30일 오후 인천 청라 통합데이터센터에 모여 '디지털 비전 선포식'을 열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정보회사로 거듭나자'고 다짐했다.
이 자리에 김 회장은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참석했다. 행사 이후 김 회장은 기자들과 만나 데이터센터가 하나금융그룹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직접 브리핑을 했다.
◇ 국내 최대규모 금융데이터센터…매일 100건 해킹 막아내
하나금융그룹 통합데이터센터는 지난해 6월 연면적 6만5711㎡(약 1만9878평) 규모로 준공됐다. 금융권에서 NH통합IT센터 이후 두번째로 지어진 통합데이터센터다. 그룹내 모든 인적·물적 IT인프라를 한곳에 모은 것은 최초다.
하나금융 통합데이터센터(사진)는 외형적으로는 외부 방문객을 위한 웰컴센터와 주요 시스템이 들어선 코어센터, 그룹내 IT 직원들이 근무하는 비전센터 등 3개 구역으로 나뉜다.
기능적으로 전력시스템과 보안시스템, 데이터시스템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중 김 회장이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보안이다. 하나금융그룹 기준으로 하루에 들어오는 보안 공격은 100만여건이나 된다. 보안시스템으로 5만여건의 공격을 분석해 많게는 1000여개의 공격유형으로 분류해 대응을 하고 있다.
김 회장은 "가장 중요하고 공을 들인 설비는 보안시스템"이라며 "화이트해커도 고용해 보안수준을 높여 고객이 마음 편히 금융을 이용할 수 있도록 통합보안시스템을 운영중"이라고 설명했다.
◇ 그룹 데이터 총 결집…"정보가 하나금융의 핵심 경쟁력"
데이터 관련 부분의 핵심은 통합이다.
하나금융그룹은 계열사의 IT역량을 모두 청라 통합데이터센터로 모았다. 이렇게 구성된 인프라를 통해 하나금융그룹이 지금까지 모은 빅데이터 양은 약 2페타바이트 분량으로 추산된다. DVD 영화로 전환하면 34만8000편 분량이다.
이렇게 모인 데이터는 데이터센터를 통해 가공돼 실제 이용할 수 있는 정보가 된다.
김 회장은 이 과정을 바다와 비유했다. 그는 "지구 면적의 70%가 바다이지만 이중 2%만이 인간이 마실 수 있는 물로 바뀐다"며 "데이터(data)도 우리가 이용가능한 정보(information)가 되기 위해서 정제되고 분석돼야 하는데 이 작업을 하는 곳이 통합데이터센터"라고 설명했다.
이어 "은행 따로 증권 따로 보험 따로 데이터를 관리하면 정보화 과정이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드는데 이렇게 통합하면 비용도 줄이고 효율도 높아진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이같은 빅데이터 활용을 통해 회사를 단순 금융회사가 아니라 정보회사로 탈바꿈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 과정에서 기존 직원을 줄여서 IT담당 인원을 늘리지는 않겠다는 게 김 회장의 방침이다.
김 회장은 "그룹내 각 조직을 셀(cell)로 구성해 셀마다 IT직원과 현업부서 인력을 같이 배치할 예정"이라며 "서로 협업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서로 업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 결국 IT와 현업을 구분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과거 행원 시절 전산실 근무를 통해 현업과 IT 능력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올해부터는 일반 직원들에게도 코딩교육을 시켜 IT역량을 강화시킬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구상을 받쳐주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전력공급이 중요하다. 하나금융 통합데이터센터는 인근 두개의 변전소를 통해 전력을 공급받는다. 이렇게 받은 전기는 축전지와 UPS(무정전전원공급장치)에 저장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별도로 태양광 발전 시설도 갖췄다.
◇ 그룹 본부도 이전 예정…"통합시스템 비용절감해 디지털 재투자"
김 회장은 통합데이터센터가 스페인의 산탄데르은행의 본사인 '산탄데르그룹 시티'가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스페인의 중소은행에 불과했던 산탄데르은행은 산탄데르 그룹 시티를 건설하며 유로존 내 최대 은행으로 거듭났다.
산탄데르 모델처럼 청라지구에는 하나금융의 통합데이터센터 외에도 연수원과 그룹헤드쿼터(본부), 업무지원센터, 주민관련 시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현재 데이터센터에서 근무하는 인력은 1800여명 수준이지만 향후 관련시설의 입주가 끝나면 약 3500명 정도가 근무할 예정이다. 오는 2023년을 목표로 설계작업을 마친 그룹 본부(헤드쿼터)가 준공되면 회장 집무실도 청라로 옮길 가능성이 있다.
김 회장은 이런 구상을 위해 매년 5000억원 가량의 비용을 청라에 쏟고 있다. 그는 "초기에는 하드웨어 투자비용이 많이 들어가지만 통합시스템 운용으로 그룹내 총 비용은 절감되는 중"이라며 "이후 클라우드 시스템이 완성되면 서버 비용만 80% 가량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절감된 비용은 이익으로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룹의 디지털사업에 재투자할 방침"이라며 "하나금융의 미래가 데이터산업에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