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앞으로 석달간 무제한 돈풀기에 나선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사용한 적이 없는 과감한 조치다.
코로나19로 인한 실물경제 위축과 금융시장 불안을 발권력을 동원해 진화하겠다는 의도가 담겼다. 한은은 필요시 추가적인 조치에 나설 여지도 남겼다.
◇ 매입한도 없앴다
한은이 돈풀기를 위해 꺼낸 카드는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이다.
RP는 일정기간 후 국공채 등을 매매하는 조건으로 거래하는 채권이다. 한은은 그간 RP 매각이나 매입을 통해 시중의 통화량을 쥐락펴락 했다. RP를 매입하면 본원통화가 시중에 공급되고, 매각하면 본원통화가 흡수된다.
특히 RP매입은 지급준비금 마감일을 앞두고 단기자금시장에 일시적 마찰이 발생할 때 한은이 간헐적으로 사용하던 방식인데 이번에는 3개월간 매주 정기적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규모 자체도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다. 2008년 금융위기 때에는 사전에 정한 금액만큼 RP를 사들였지만 이번엔 매입규모를 정해두지 않았다. RP거래를 할 수 있는 채권만 가져오면 무제한으로 돈을 풀겠다는 것이다.
◇ 공공기관 채권도 포함
RP 대상채권의 벽도 허물었다. 그동안은 국채와 통화안정증권, 정부보증채, 주택금융공사채만 RP매입 대상이었으나 내달부터는 일반 은행채는 물론 한전·도로공사·가스공사 등 8개 공공기관의 발행채권까지 받아주기로 했다.
금융위기 당시엔 공공기관 중 토지공사·주택공사·중소기업진흥공단이 발행한 채권까지 인정해줬는데 이번에는 대상채권을 더 늘린 것이다. 전당포로 비유하면 금반지만 받아주던 곳이 은반지와 구리반지까지 받아주겠다는 것과 같다.
당장의 현금이 부족한 금융기관은 기존에 사둔 채권을 들고 가면 된다. 이 채권마저 없다면 국민연금이나 한국증권금융 같은 곳에서 채권을 빌려 한은에 가져가면 돈을 받을 수 있다.
한은은 석달 뒤 금융기관이 되사는 조건으로 RP를 매입(91일만기)하는데, 이는 일시적 자금경색에 빠진 금융기관에 3개월간 급한 불을 끌 시간을 준 것과 다름없다. 기존 RP매입에선 기껏해야 하루나 이틀짜리 만기만 운용했다.
◇ 전례없는 길 가는 한은
한은이 무제한 돈풀기 방식을 선택한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에선 이미 양적완화가 시행된지 오래지만 한은은 물가불안 등 부작용을 우려해 기준금리만 조정하는 전통적 통화정책을 고수했다. 거꾸로 얘기하면 한국경제가 양적완화가 아니고선 안될 만큼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는 걸 의미한다.
윤면식 한은 부총재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비교하면 대다수가 지금의 충격이 크다고 할 것"이라며 "IMF외환위기 때의 충격보다 지금이 더 큰지 아닌지는 지나가봐야 알 것"이라고 했다. 2008년 금융위기를 뛰어넘는, 사실상 1997년 터진 IMF 외환위기에 준하는 수준으로 현 국면을 바라본다는 걸 시사하는 발언이다.
윤 부총재는 이번 조치와 관련해서도 "양적완화로 봐도 틀린 건 아니다"고 했다. 한은의 조치는 미국 연준이 이달 기준금리를 두차례에 걸쳐 1.50%포인트 인하하고 사흘전에는 무제한 양적완화와 신용시장 지원대책을 발표한 것과 비슷한 궤적을 그렸다.
한은은 연준 발표시기에 맞춰 지난 16일 기준금리를 0.50%포인트 인하했고, 금융시장 변동성이 확대되자 무제한 돈풀기라는 양적완화를 결정했다.
◇ 위기국면 존재감 부각
한은이 그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게 된 배경에는 정부의 응원도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9일 주재한 첫 비상경제회의에서 이주열 한은 총재를 향해 두차례 "감사하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50조원 규모의 비상금융조치를 발표할때 한은이 큰 역할 해줬다는 얘기다.
닷새 뒤 정부가 100조원 규모로 확대된 대책을 발표할 땐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하면서 "한은에 감사드린다"고 했다. 발권력이라는 무기를 가진 한은에 기대하는 게 있다는 뉘앙스였다.
이에 화답해 한은은 이날 보도자료에서 "정부의 민생·금융안정 패키지 프로그램의 시의적절한 운영을 지원하기 위해"라는 표현을 담았다. 지난 19일 오후 600억달러 규모의 한미 통화스왑 계약에 이어 사실상의 양적완화 조치로 한은의 존재감이 더욱 부각될 전망이다.
◇ "연쇄위기 막는 조치" 긍정평가
금융시장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이날 오전 국고채와 통안증권, 회사채 등 주요 채권금리가 일제히 떨어졌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주가, 채권가격 및 원화 가치가 동반 하락하는 등 금융불안이 재연되고 있고 4월 유동성 부족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에서 이번 조치는 단기 유동성 부족 우려를 상당부분 완화시켜 줄 것"이라고 평가했다.
장호규 충남대 경영학과 교수는 "금융기관이 자금난에 시달리면 기업대출을 회수하는 등 실물부문으로 연쇄위기가 올 수 있어 한은이 유동성을 공급해 급한 불을 끄는 것"이라며 "늦은 감이 있지만 더한 위기가 올 가능성을 대비한 조치도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내친 김에 회사채도… "정부보증 필요"
한은은 이번 조치를 3개월간 시행한 뒤 입찰결과와 시장상황 등을 고려해 연장 여부를 별도로 결정할 계획이다. 한국판 양적완화가 석달만에 끝날 수도 있고, 더 길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은은 또 시장불안이 계속될 경우 추가적인 대책을 내놓을 가능성을 열어놨다. 금융권에선 한은이 회사채 매입 등의 방식으로 실물부문에 직접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안을 동원할지에 관심을 두는 분위기다.
현행 한은법상 정부 보증이 없으면 한은이 회사채나 기업어음을 직접 매입하는 게 불가능하다. 윤 부총재는 "상황이 악화되면 그때 상황에 맞춰 추가적 대응방안을 강구하겠다"며 "정부가 보증을 한다면 금통위가 회사채 매입 결정을 하는데 용이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국회를 설득하고, 이를 통해 지급보증이 이뤄지면 한은도 나몰라라 하진 않겠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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