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의 시작은 유난히 더웠던 여름부터였다. 가을쯤이 되면 개인적으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게될 일이 생겼다. 구체적인 시기는 날이 쌀쌀해질 무렵인 11월이었지만 7월부터 미리미리 머리 속으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예상 대출 금액은 신용대출 1억원가량. 실제 필요한 금액을 웃도는 액수였지만 워낙 금리가 낮다보니 혹시 모를 여유자금도 마련할 겸 넉넉하게 설정했다. 신청시기도 9~10월쯤으로 여유있게 잡았다. 하지만 아뿔사! 그건 일생일대의 엄청난 착오였다.
당시만 해도 굳이 미리 돈을 빌릴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금 계획을 세운 시점과 필요한 시점의 시차가 크면 미리 빌려 이자를 더 내야하기 때문이다. 공모주를 비롯한 주식 투자 열풍이 불었지만 빚내서 투자할 용도는 아니었다.
당시 은행권의 영업행태도 자금계획 수립에 영향을 줬다. 신용대출은 1억원에서 많게는 2억원까지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고 필요한 만큼만 꺼내 사용할 수 있는 마이너스 통장 역시 1억원까지 발급이 됐다. 기준금리도 0.5%로 역대 최저 수준으로 신용대출을 받더라도 최저 2%대의 금리를 기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미 금융당국은 7월부터 가계부채 증가세를 잡기 위한 조짐을 보이긴 했다. 당장 7월부터 6억원 이상 주택담보대출을 받거나 1억원 이상 신용대출 시 차주별 DSR(총부채상환비율)을 적용한다는 방침을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크게 와닿지 않았다. 6억원 이상 주택을 살 생각도 없었거니와 신용대출을 1억원 이상 받더라도 현재 대출이 없고 근로소득자 평균연봉(4000만원)에서 크게 동떨어지지 않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으니 1억원을 신용대출로 받더라도 DSR 규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참고로 당시 규제를 기준으로 연봉이 4000만원인 사람이 1억원 이상의 신용대출을 받을 경우 연 원리금 상환액은 133만원을 넘어서는 안됐다. 7월까지 신용대출의 만기를 7년, 원리금균등상환을 조건으로 DSR을 산출했다. 금리는 2.8% 수준으로 고려해 딱 1억원까지의 신용대출이 충분히 가능했다.
기자의 경우는 운 좋게도 50년이 넘은 자그마한 주택을 7년 전 구매했다. 이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받더라도 시세는 6억원이 넘지 않으니 DSR규제 도입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었다.
여름이 끝날 무렵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새로 내정된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가계부채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취임 직후부터 가계부채를 옥죄는 내용의 규제를 내놓겠다는 시그널을 연이어 보냈다.
이에 먼저 응답한 것은 은행이었다. 은행들은 그간 통크게 내어줬던 신용대출 한도를 급격하게 줄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NH농협은행의 경우 주택담보대출의 취급을 중단하기까지 했다.
주택관련 자금을 빌리려 했던 기자는 애초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수 있었지만 신용대출을 택한 이유가 있다. 한도도 넉넉했고 만기는 기본적으로 1년이지만 만기 갱신이 쉬운데다 만기일시상환인 경우가 많아 이자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혹여나 목돈이 생기면 중도상환수수료 걱정 없이 쉽게 갚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주택담보대출의 경우 만기가 길고 3년 이내 상환 시 중도상환수수료까지 내야한다. 게다가 정부가 강력하게 규제망을 펼치고 있는 대출 영역이다 보니 대출 심사도 오래걸린다. 모바일로 손쉽게 1억원까지 빌릴 수 있는 신용대출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결국 은행들이 신용대출 한도를 줄이고 우대금리까지 폐지하면서 대출 계획은 전면 수정에 들어갔다. 받을 수 있는 한도는 애초 세워뒀던 자금 계획보다 크게 줄었고 내야 하는 이자 부담도 불어났다.
신용대출을 받으려 했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부랴부랴 주택담보대출로 선회했다. 신용대출을 받더라도 한도가 줄어들어 모자란 금액을 대출받으려면 주택담보대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주택담보대출의 경우 담보대출을 실행하는 날을 기준으로 한달 이전부터 신청이 가능하다.
대출 실행 예정일은 11월 말. 대출 심사를 진행하려면 10월 말까지 기다려야 했다. 대출실행 한달 전 시점이 될 때까지 점차 강화되는 규제 속에서 피말리는 시간은 계속됐다.
상황은 더 악화했다. 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을 더욱 옥죄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주택담보대출 취급을 중단했던 NH농협은행은 물론 KB국민은행과 우리은행은 지점별로 월별 대출 한도를 설정했다. 사실상 대출을 선착순으로 받는 상황이 펼쳐진 것.
그 사이 금융당국은 또다시 초강력 가계부채 대책을 내놨다. 당장 내년부터 DSR 규제를 조기도입한다는 게 골자다. 내년 초부터는 2억원 이상 대출을 받을 경우 모든 대출은 DSR 40% 이내에서만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신용대출 만기는 종전 7년에서 5년으로 줄여서 DSR을 산출한다. 금융권 취재를 하는 입장에서 볼 때 당장 올해보다 더한 대출 한파가 내년에 닥칠 것이란 예감이 스쳐지나갔다. 연말에 미리 대출을 받으려는 가수요 역시 늘어날 것이 자명했다.
대출 실행을 예정한 날이 한달 앞으로 다가오자 업무 외 시간마다 틈만 나면 은행을 찾았다. 주거래 은행이던 A은행은 물론 첫 계좌를 만든 B은행, 그리고 나머지 주요 시중은행 영업점을 두루두루 찾았지만 대출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많은 은행 영업점들은 한결같이 올해 한도가 소진됐으니 다른 영업점을 방문하라는 말뿐이었다. 리스크가 적은 담보대출을 받으려고 하는데도, 금융당국이 제시했던 상환능력을 충족하는데도 대출이 불가능했다. 대출 빙하기의 한파를 직접 피부로 실감한 셈이다.
그렇게 여러 은행을 전전한 끝에 다행히 한 은행에서 대출 심사를 받는데 성공했다. 은행 창구 직원으로부터 별 무리가 없는 이상 대출이 가능할 것이라는 말을 전해듣는 순간 여름부터 쌓여온 근심이 눈녹듯 사라졌다. 동시에 왜 하필 이 시기에 대출이 필요해서 이 고생을 했을까 하는 허탈함도 밀려왔다.
금융권은 대표적인 규제산업이다. 금융당국의 규제 기조에 따라 금융회사 영업 방침도 시시각각 바뀌는 것이 일상이다. 하지만 최근 피말리는 시간들은 불과 3~4개월 사이에 걸쳐있다. 적지 않은 금융권 취재 기간동안 이번만큼 급박하게 규제가 바뀌었던 적은 많지 않았다. 직접 체험까지 하다보니 강력한 규제일수록 금융당국이 시장 실수요자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줘야한다는 점이 강하게 와닿았다.
일단 금융당국은 300만원 이하 소액 대출이나 결혼식, 장례식 등 급한 대출수요자들의 경우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소액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자금수요도 있으며, 증빙하는 시간이 오래걸려 자금계획이 틀어지는 경우도 고려해야 한다. 강한 규제를 내놨으니 이에 맞는 구체적인 실수요자 구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앞서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전세대출에 대한 규제를 시사한 이후 실수요자들의 거센 반발에 한 발 물러선 것도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은 채 규제 일변도로 시장의 자금흐름을 규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대출규제가 심하지 않았던 시점에서 정말 대출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은 그동안 정부가 우려했던 투기수요보다는 실수요자가 더 많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번 대출규제가 본격 도입되는 내년, 실수요자들의 곡소리가 들려오지 않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