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종말론'이 꿈틀거리고 있다. 2018년 이후 암호화폐 열풍이 세계를 뒤흔들면서다. 일부 암호화폐 옹호론자는 현재 화폐 시스템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확신한다. 이들은 암호화폐가 보편적인 화폐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전망한다. 나아가 암호화폐가 기존의 돈이나 신용(대출)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을 해방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은 중앙은행과 화폐의 역할에 대한 통념을 흔들어놨다. 팬데믹 초기 록다운이 이어지면서 시장경제가 멈추는 듯하자, 세계 각국 정부는 돈을 찍어내 쏟아부었다. 상품과 노동, 자본이 순환되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 정부가 돈을 시민의 통장에 '직접' 넣어주기도 했다. 19세기 초 산업혁명 이후 보기 드물었던, 기묘한 돈 실험을 벌인 셈이다.
정부가 시민의 통장에 적어준 숫자는 돈일까, 아니면 빚일까. 정부가 뿌린 돈을 바탕으로 한 상거래는 정상적일까. 정부가 끝내 부도나지 않을까. 부도는 아니더라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진 않을까. 그래서 돈이란 무엇일까. 언젠가는 암호화폐가 기축통화가 될 수 있을까. 암호화폐 옹호론자가 꿈꾸는 세상은 올 수 있을까?
이 책은 역사와 경제위기를 통해 '돈의 정체(moneyness)'를 파헤친다. 돈은 어떻게 탄생하고 사라졌는지, 사회적 분업 단계에 들어서면서 돈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돈과 경제위기는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 경제위기 때마다 돈의 위상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등을 다룬다. 블록체인 등장으로 시중은행 지위가 약해졌을 경우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도 예측한다.
특히 저자는 이해를 돕기 위해 돈을 바이러스에 비유한다. 바이러스가 숙주 없이는 스스로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돈 역시 '생산물과 서비스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유통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시대에 따라 돈의 숙주는 점토 토큰, 금화, 은화, 종이돈, 디지털 신호 등으로 진화해 왔다.
저자가 영국 버밍엄대학과 런던정경대학(LSE)에서 공부하며 들은 내용, 저자가 경제기자로 활동하며 직접 경제 전문가를 인터뷰한 내용 등을 담은 점도 특징이다. 제임스 리카즈, 안토니오 파타스 교수, 마크 파버, 베르나르 리에테르 등을 인터뷰한 과정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암호화폐가 돈을 자처하고 나선 이 시기에 이 책은 화폐와 투기성 상품을 구별할 혜안을 제시해준다. 돈을 버는 방법을 알기 전에 돈이 무엇인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저자 강남규는 29년간 저널리즘에 몸담았다. 한겨레 신문, 이데일리 등을 거쳐 현재 중앙일보에서 국제경제 기사를 쓰고 있다. 유튜브 채널 <삼프로TV>의 글로벌 머니 토크에서 공동 진행을 맡고 있다. LSE에서 경제사(석사) 과정을 마쳤으며 영어권 경제 서적 15권 이상을 번역하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는 '지긋지긋한 빚 탈출' 등이 있다.
[지은이 강남규/펴낸곳 스타리치북스/4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