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은행들이 지난해부터 기업금융 시장에 주력하는 것은 급증한 가계부채로 금융당국이 가계대출 수요 조절에 나선 영향이 크다. 대출자산 증대를 위해선 기업대출이 유일한 돌파구인 까닭이다.
올 들어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특히 홍콩 H지수 ELS(주가연계증권) 사태로 은행 비이자이익 가운데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신탁 수수료를 늘리는 것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하지만 공격적인 기업금융 시장 공략 과정에서 펼쳐지는 경쟁은 은행들의 건전성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내 기업들의 경영 환경이 녹록지 않다는 점도 은행에 부담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젠 가계대출 아닌 기업대출
금융권에 따르면 2월말 기준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가계대출 잔액은 전년보다 1.5% 증가한 695조8823억원에 그쳤다. 반면 기업대출 잔액은 9.3% 성장한 776조7107억원이다. 가계대출이 105조원 가량 늘어나는 동안 기업대출은 6배 많은 658조원 가량 증가했다.
은행 가계대출 자산이 제자리걸음 수준인 것은 금융당국이 가계부채 관리를 통한 금융시장 안정을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삼고 있는 까닭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은 1100조3000억원으로 사상 처음으로 1100조원을 넘어선 상태다.
여기에 고금리 기조와 높은 집값에 대한 부담으로 주택매매 시장이 침체되면서 더 낮은 금리로 갈아타기 위한 대환대출을 제외하면 신규 대출 수요는 많지 않은 상황이다.
비이자이익 대다수를 차지하는 수수료이익을 늘리기도 어려운 처지다. 금융당국이 금융소비자보호법 개정을 통해 은행들의 중도상환수수료 운용 폭을 줄였고 H지수 ELS 사태로 신탁 판매에 힘을 싣기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수수료이익의 상당 부분인 신탁 수수료를 포기해야 하는 셈이다.
비이자이익 확대가 어려운 만큼 이자이익 증대에 기댈 수밖에 없고, 가계대출이 아닌 기업대출을 늘리는데 주력해야 하는 이유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가계대출은 당국 가이드라인에 맞춰 적정 규모의 자산 증대만 가능하고, 수수료 이익을 늘리기도 어려워 기댈 곳은 기업금융 뿐"이라며 "작년에는 대기업 대출 수요가 있어서 그나마 기업대출 자산을 늘릴 수 있었지만 올해는 지난해와는 달라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중심으로 대출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부실 커질라' 건전성 관리 관건
은행들이 기업금융에 공격적으로 나서면서 건전성에 대한 우려도 동시에 커지고 있다. 한정된 시장에서 기업 대출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상대적으론 낮은 신용등급의 기업들에 대출이 이뤄지는 현상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국내 경제 성장률이 지난해보다 나아지고 무역수지도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지만 과거에 비해선 여전히 부진한 수준이라는 점에서 기업들의 경영 환경이 나아질 것이란 기대를 갖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와 함께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상반기 기준금리 인하에 선을 긋는 등 금리 조기 인하 가능성이 낮아진 점도 기업들에게는 부담이다. 금리가 낮아지면 기업들의 이자보상배율(기업의 영업이익을 금융비용으로 나눈 비율) 개선을 기대할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 금융비용 부담을 버티지 못하는 기업들이 급격히 늘어날 수도 있어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경쟁적으로 기업대출을 늘리려면 그 동안 취급하지 않았던 기업들(신용등급이 낮은)에도 대출을 하는 경우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과도하게 기업대출을 늘리는 과정에서 연체율과 고정이하여신비율이 늘어나는 등 건전성이 흔들릴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이미 국내 은행들의 고정이하여신비율(NPL비율)도 작년에 비해 높아진 상태다. 고금리 장기화에 개인 취약차주 연체율 상승 뿐 아니라 기업대출 증가 과정에서 부실 대출이 늘어난 영향도 반영됐다는 게 은행권 분석이다.
권흥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미 코로나19 기간 중소기업과 개인사업자 등 기업대출이 빠르게 증가했다"며 "은행들이 목표 달성을 위해 기업대출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우리 기업들이 생산설비 추가 등을 위해 대출을 받을 만큼 우리 경제가 역동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부분 버티기 위한 추가 대출이 많았을 것"이라며 "특히 대출 과정에서 설정한 담보의 자산가치 하락 등도 리스크 요인"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