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상징하는 단어, ‘워커홀릭’(Workaholics).
지난해 해외 유명 만화 사이트 ‘도그하우스 다이어리’가 세계은행과 기네스북에 오른 자료들을 바탕으로 나라별 특징을 담은 세계지도(What Each Country Leads the World in)를 내놨다. 이 지도에서 중국은 ‘이산화탄소 배출과 신재생에너지’, 일본은 ‘로봇’, 북한은 ‘검열’로 표현됐다. 그런데 한국은 일 중독자를 의미하는 ‘워커홀릭’이었다. 오랜 시간 일하기로 악명 높은 국내의 현실을 보여주는 씁쓸한 단면이다.
▲ 지난 2013년 10월18일 만화사이트 '도그하우스 다이어리'가 공개한 세계지도(위), 지도에서 우리나라를 확대한 일부(아래) |
실제로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6개 회원국을 조사한 결과 한국인의 연평균 근무시간은 2090시간으로 OECD 평균 1776시간을 크게 웃돌았다. ‘일과 삶의 균형’ 부문에서는 조사 대상 36개국 가운데 34위를 차지했다. 야근 때문에 직장에 오랜 시간 매여 있으니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힘든 것이다.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22일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일하지만 노동생산성은 OECD 전체 평균의 66%로 미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밝혔다. 이어 OECD 통계를 인용해 "한국인의 하루 평균 수면시간이 세계 꼴찌인 이유도 근무 시간이 가장 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OECD가 지난 2009년 발표한 ‘회원국 사회지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수면 시간은 7시간 49분으로 조사대상인 OECD 18개 국가 중 가장 짧았다.
◇ 다음..일과 삶의 균형 최고점
미국 취업정보 사이트 ‘글래스도어’ 리뷰 코너에는 외국인 직원들이 국내 기업의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해 피부로 체감한 현실이 드러나 있다. 외국인 직원들은 국내 40대 대표 기업의 ‘일과 삶의 균형’ 항목에 평균 3.0점(5.0 만점, 1.0은 ‘불만족’ 3.0은 ‘괜찮다’ 5.0은 ‘매우 만족’)을 줬다. 글래스도어가 발표한 지난해 전세계 기업의 ‘일과 삶의 균형’ 평점은 3.2점이다. 근무 조건이 한결 낫다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일과 삶의 균형’ 점수가 중소기업을 포함한 전 세계 약 30만개 기업의 평균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 글래스도어에 오른 국내 40대 기업의 '일과 삶의 균형'(Work &Life Balance) 항목 점수. (7월21일 기준) |
40대 기업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기업은 '다음'(4.1점)이었다. 다음은 “여가를 즐기기 좋은 회사”라는 평을 받았다. 다음은 지난 2004년 본사를 제주도로 옮겼다.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카페, 도서관, 게임룸 등을 지었다. 제주의 두 번째 사옥인 ‘스페이스닷투’에는 보육시설도 꾸몄다. 이 곳에 아이를 맡긴 직원들은 근무 시간 중 언제든 아이를 보러 올 수 있다.
▲ 다음이 지난 2012년 4월 12만5619㎡ 부지에 마련한 제주도 사옥 '스페이스닷원'(Space.1) |
LG, OCI, SK텔레콤, 두산중공업 등은 각각 2위부터 5위를 차지했다. 특히 SK텔레콤은 “직원들의 행복과 관심을 좇는 회사” “일과 삶의 균형면에서 한국기업 중 최고” 등 긍정적인 평이 쏟아졌다.
반면 동부, 한화, 대우인터내셔널, 효성, SK하이닉스 등은 낙제점을 받았다. 대우인터내셔널의 외국인 직원들은 “할 일을 끝내면 오후 6시에 퇴근해도 된다. 하지만 6시 전에 일을 끝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사람이 일을 그만 두면 대체할 사람을 뽑지 않고 남은 사람들에게 일을 맡긴다” 등의 후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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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외국인 직원들은 일과 삶의 균형이 깨진 이유로 '야근'을 지목한다. '책상 앞에 앉아 엉덩이만 붙이고 있으면 된다'는 식의 불필요한 야근,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과도한 업무가 이들을 지치게 하는 원인이다.
◇ 직원이 푹 쉬어야..기업경쟁력 ↑
일과 삶의 균형은 ‘직원의 행복’ 뿐 아니라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필수적이다.
글로벌 컨설팅 리서치업체 CEB(Corporate Executive Board)가 지난 2013년 발표한 '글로벌 노동 시장 조사'(Global Labor Market Survey)에 따르면 ‘일과 삶의 균형’은 ‘보상’(compensation) 다음으로 직장인들이 중요하다고 꼽은 요인이다. CEB는 또 “더 나은 일과 삶의 균형을 느끼는 직원은 그렇지 않은 직원들보다 21% 더 열심히 일하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불필요한 야근은 기업 경쟁력을 갉아 먹는다는 인식도 퍼져 있다. 직원들이 푹 자고 푹 쉬어야 일도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됐기 때문이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의 랜돌프 토마스 교수가 지난 1997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근로 시간이 주당 40시간에서 50~60시간으로 늘어나면 생산성은 10~15%정도 감소한다.
지난 2000년 윌리엄슨과 페이어가 '직업 및 환경의학(Occupational and Environmental Medicine)'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24시간 동안 잠을 못자면 혈중 알콜농도가 0.10%에서 활동하는 것과 같다. 혈중 알콜농도 0.10%로 운전을 하면 면허취소다. 야근을 시키며 직원의 잠 잘 시간을 빼앗으면 직원들에게 ‘낮 술’을 마시도록 하는 것과 같은 역효과를 불러온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난 1983년 5000만 달러(513억원)의 손실을 남긴 엑손 발데즈의 유조선 좌초사건이나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등도 수면 부족으로 발생했다.
▲ 야근에 대한 직장인의 '공포'를 좀비 영화 포스터에 빗대어 표현한 그림. 상단 제목에는 "나의 뇌를 먹은 직장 제2부 - 지옥의 야근", 하단에는 "개봉 박두 : 제3부 - 죽은 자의 새벽"이라고 적혀 있다. |
◇ 20~30대 “일과 삶의 균형 중요”
국내에서도 ‘일과 삶의 균형’의 중요성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다.
젊은 직장인들은 이직을 고려할 때 1순위로 ‘야근 유무’부터 살핀다. 취업포털 잡코리아(www.jobkorea.co.kr)는 지난 17일 20~30대 남녀 직장인 745명을 대상으로 ‘연봉이 다소 낮더라도 이직하고 싶은 기업문화’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야근이 많지 않고 개인 연차 사용이 자유로운 곳’으로 이직하고 싶다는 의견이 남자는 52.6%, 여자는 63.1%로 가장 많았다.
야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은 지난 2013년 직장인 1872명을 대상으로 ‘직장인 야근 현황’을 조사했다. 그 결과 응답자의 79.6%는 야근 때문에 이직까지 생각해 봤다고 밝혔다.
또 야근이 미치는 영향으로 ‘건강이 나빠졌다’ ‘가족, 친구에 소홀해졌다’ ‘업무 집중력이 떨어졌다’ 등 부정적인 영향을 꼽았다. 야근을 하는 이유로는 "할당된 업무량이 과중해서"라는 대답(55.6%)이 가장 많았다.
정부와 기업들도 '일과 삶의 균형'이 자리잡도록 노력하는 추세다. 고용노동부는 상사 눈치를 보며 마음껏 쉬지 못하는 문화를 개선한다는 취지에서 '일家양득' 대국민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삼성은 최근 가족동반 해외 출장을 허용했으며 현대백화점은 오후 6시 반이면 사무실 PC가 자동으로 꺼지는 'PC오프'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SK그룹의 일부 계열사는 오후 7시 이후 야근을 막는 ‘초과근무 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