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만삭스가 변했다. 독성이 강하고 파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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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간 골드만삭스에 몸담은 그렉 스미스 파생상품부문 부사장은 지난 2012년 3월14일자 뉴욕타임스에 '나는 왜 골드만삭스를 떠나는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가 회사를 떠나는 이유는 기업 문화 때문이었다.
그는 "골드만삭스의 성공에 있어 기업 문화를 빼 놓을 수 없다"며 "기업문화는 골드만삭스가 지난 143년 동안 고객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성공의 비밀"이라고 했다. 그런 기업문화가 변했다고 본 것이다.
미국 글로벌 기업인 제너럴일렉트릭(GE)은 130년 이상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로 ‘준법 정신’을 꼽는다. GE의 경영 원칙은 '법에 의한 경영'이다. 경영진들이 직원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 문화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스스로 법을 지키게끔 한다. 전세계 30만명 GE 직원들은 '윤리경영 정신과 서약서'(The Spirit & The Letter)에 서명해야한다.
▲ GE '윤리경영 정신과 서약서' (자료: 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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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3년 160억달러(16조원)의 천문학적인 손실을 내며 침몰 직전이었던 IBM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도 기업문화 덕택이었다. 위기 속에서 IBM은 루이스 거스너를 CEO로 영입했다. 그는 기업의 경영 전략, 비전, 문화를 전면적으로 뜯어 고쳤다. 그는 “문화는 모든 것이다.(Culture is everything)”라고 말한다.
◇ 제대로 된 기업 문화 없으면 ‘휘청’
만약 기업 문화가 직원들을 질리게 한다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처럼 직원들이 그저 회사를 떠나면 그만일까. 기업은 안에서부터 서서히 곪아가기 시작한다. 남은 직원들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최악의 경우 회사가 망하든 말든 나 몰라라 식으로 변한다.
애드 킨스와 콜드웰은 지난 2004년 ‘조직행동저널’(Journal of Organizational Behavior)에 “기업문화에 따라 직원들의 ‘직업 만족도’가 달라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직원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기업문화가 실제와 다를 경우 스트레스를 받고 이직을 고려한다.
▲ 지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뉴욕 월스트리트의 탐욕스러운 기업 문화를 풍자하는 카툰. 말풍선 안에는 "누군가 나한테 탐욕스럽다고 말할 때마다 1달러씩 생기면 좋겠어. 그러면 100달러는 될거야"라고 쓰여 있다. |
잘못된 기업 문화는 조직내부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지난 2008년 말 발생한 미국발 금융 위기는 '영혼' 없는 기업의 말로를 보여준다.
당시 많은 월가 금융 기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돈' 이외에 제대로 된 기업문화가 없었던 셈이다. 경영진들은 조직이 위험에 처하자 고객보다는 자신들의 호주머니 채우기에 바빴다. 결국 회사는 파산했고, 그 경제적 피해와 고통은 세계 각국이 분담했다.
◇ 롯데 현대모비스 한화 등 하위권
우리나라도 기업 문화 때문에 많은 직장인들이 이직을 고려한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이 지난 2일 이직 경험이 있는 직장인 898명을 대상으로 “충동적으로 퇴사 및 이직을 결정한 경험이 있나?”라고 물은 설문에서 조사 대상자의 57.7%가 "있다"라고 답했다. 퇴사를 결심한 이유(복수 응답 가능)로는 대인간 갈등, 경영진에 대한 불신 등 기업 문화와 관련된 불만이 많았다.
▲ 직장인들이 직장을 그만두거나 이직하고 싶은 이유(자료: 사람인) |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의 생각 역시 다르지 않다. 이들은 일부 경영진의 '나'만 아는 이기적인 회사 경영과 꽉 막힌 기업문화를 지적했다. “CEO가 15세기 왕 같다. 회사 문화가 융통성이 없다. 경영진이 돈만 밝힌다”는 것이다.
전현직 직원들이 리뷰를 올릴 수 있는 미국 취업정보사이트 ‘글래스도어’에는 외국인 직원들을 고용한 한국 기업들의 '평점'과 ▲기업문화와 가치 ▲일과 삶의 균형 ▲상사(관리자) ▲ 보상과 복지 ▲ 경력 기회 등 5가지 점수가 공개된다. 이 중 국내 40대 기업의 '기업문화와 가치' 항목 평균 점수는 2.8점(5.0 만점)이다. 1.0은 ‘매우 불만족’ 3.0은 ‘괜찮다’ 5.0은 ‘매우 만족’을 의미한다. 외국인들이 바라본 한국의 '기업 문화'는 평균 이하라는 얘기다.
▲ 글래스도어에 오른 국내 40대 기업의 '기업문화와 가치'(Culture & Value) 항목 점수. (7월7일 기준) |
외국인 직원들은 ‘기업 문화와 가치’ 항목에서 상위권에 오른 기업에 대해 ‘수평적’ ‘혁신적’이라고 평가했다. 한국 기업 가운데 가장 높은 평점을 받은 ‘SK텔레콤’에 대해 한 외국인 직원은 “한국 기업들은 대개 보수적이며 기업 문화가 수직적이지만 SK텔레콤은 그에 비해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또 “여러 프로젝트를 맡아 유연하게 일할 수 있다”(LG) “개발자에게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다음) “항상 새로운 것을 찾으며 굉장히 혁신적이다”(네이버) 등의 리뷰를 달았다.
하위권 기업들은 직원들에 대한 ‘불신’과 ‘무시’가 도마에 올랐다. 현대모비스에서 애널리스트로 근무하는 한 외국인 직원은 "최선을 다해 일하는데 어깨 너머로 감시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반기지 않는다"고 혹평했다. 40대 기업 중 최하위 점수(1.0점)를 받은 한화에 대해서는 "완고하고 비이성적"이라고 평가했다.
경영진의 기업문화에 대한 인식도 문제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인 ‘타워스왓슨’이 지난 2012년 발표한 ‘글로벌 인적자원 연구’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들 가운데 37%만이 ‘경영진이 조직의 핵심 가치에 따라 일관성 있게 행동한다’고 답했다. 절반을 넘는 직장인들은 '경영진이 조직 문화를 몸소 실천하며 이끄는 데 실패했다'고 답한 셈이다.
지난 2012년 빌 게이츠의 자리를 이어 받은 존 톰슨 마이크로소프트(MS) 이사회 의장은 "전 세계 모든 기업의 모든 리더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두 가지 이슈는 '관리 시스템'과 '기업 문화'"라며 "MS의 기업 문화를 반드시 바꿔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기업의 '생사'(生死)가 걸려 있는 기업문화는 전세계 CEO들의 고민거리다. 이는 '돈'을 중심 가치로 내세우는 경영 방식에 시사점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