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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를 바꾼 M&A] 현대건설 뒤집은 佛은행 자금

  • 2014.12.04(목) 15:33

④ 적통(嫡統) 싸움으로 치달았던 현대건설 M&A

▲ '금의환향'..2011년 4월 1일,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이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건설 사옥으로 처음 출근하고 있다.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승리한 현대자동차 그룹의 정 회장은 계동 사옥 12층에 마련된 집무실로 출근, 현대건설 임직원 670여 명이 참석한 조회를 주재하고 직원들을 격려했다.

 

2010년 10월 4일, 현대그룹이 주요 신문 1면에 큼직한 광고를 냈다. 

'세계 1위 자동차 기업을 기대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현대차 티뷰론을 닮은듯한 자동차 그림이 실려 있었다. 현대그룹이 형제기업인 현대차를 응원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 아래 작은 글씨체의 문장을 들여다보면 광고 의도가 드러난다.

'왜 외국 신용평가사는 자동차 기업의 건설업 진출을 우려할까요?…자동차 전문기업으로 키우고 노사가 힘을 합쳐 기술력을 높여간다면 우리도 세계가 부러워 할 자동차 브랜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현대건설의 미래는 현대그룹이 지키겠습니다'

광고의 실상은 현대건설을 넘보지 말라며 현대차에 보내는 '경고장'이었다. 현대그룹은 현대차에게 "자동차나 잘 만들라"는 충고를 한데 이어 더 자극적인 카피를 담은 2탄, 3탄 광고를 내 보낸다.

◇ 현대의 적통은 현대그룹..현대건설도 우리 몫

'경영권 승계의 도구로 쓰지 않겠습니다.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이 바르게 지키겠습니다'

 

현대차가 현대건설을 탐내는 것은 경영권 승계 발판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도발적 광고가 이어졌다. TV광고에서는 현대그룹이 현대건설의 주인이 되는 게 마땅하다는 '당위성'과 '적통성'을 강조했다. 

당시의 TV 광고를 보자.

'누구입니까. 현대건설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애쓰던 사람. (故 정몽헌 회장이 안전모를 쓰고 공사현장에서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영상의 배경으로 깔린다. 자막에는 '현대건설 회생을 위해 정몽헌 회장 4400억원 사재출연'이라는 문구가 흐른다) 그 누구도 현대그룹의 사명을 막을 수 없습니다.'

시계바늘을 석달전으로 돌려보자. 2010년 7월 현대건설 주주금융회사(채권단)가 지분 35%에 대한 매각공고를 냈다. 시장의 예상대로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이 인수의사를 밝히고 나섰다. 매각 공고 이전부터 두 그룹은 이미 물밑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차였다.

현대그룹은 공식 매각절차가 시작되자, 총력전을 펼쳤다. 여론을 등에 업기 위한 광고전에 적지않은 비용을 지출했다. 인수의지가 워낙 강한 현대그룹, 자금력이 우세한 현대차그룹 중 누가 더 많은 금액을 써낼 지 점치긴 쉽지 않았다.

입찰 결과는 현대그룹의 승리였다. 현대차그룹보다 4000억원 더 많은 5조5000억원을 써 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뜻하지 않은 이슈가 불거졌다. 자금조달계획서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 이름도 생소한 프랑스 나티시스 은행..이슈로 급부상


자금조달 계획과 관련해 현대그룹은 해외법인 한 곳이 프랑스 나티시스 은행에 1조 2000억원의 자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채권단은 직전 연도 자산규모가 33억원 밖에 안되는 되지 않는 법인이 거액 예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소명을 요구했다.

현대그룹은 나티시스로부터 대출받은 자금이라며 대출확인서를 제출했다. 채권단은 그러나 정확한 대출조건까지 담은 상세자료를 요구했다. 예컨대 이 대출금에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보증을 섰는지, 자산이나 주식이 담보로 제공됐는지, 인수할 현대건설 주식이나 자산이 담보로 제공된 것은 없는지 등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현대건설 주식이나 자산을 담보로 밀어 넣었다면 이는 차입인수(LBO, Leveraged Buy Out)에 해당한다. 국내법 상 인수되는 기업인 현대건설의 자산을 담보로 제공하는 구조는 불법 가능성이 있었다. 현대건설 자산을 담보로 제공하더라도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추가보증 등을 잘 엮어넣는 구조라면 법 문제는 피해갈 소지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대그룹은 대출확인서 외에 상세조건을 담은 계약서 제출을 거부했다. 우선협상대상자 자격으로 양해각서(MOU)까지 체결한 뒤 입찰과 관련한 추가서류를 내라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주장했다. 현대차그룹은 입찰 탈락 이후 별다른 반응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티시스 예금 문제가 떠오르자, 현대차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 현대차의 뒤집기 시도..외환銀 현대그룹에 폭격

▲ 서울 양재동에 위치한 현대·기아자동차 본사

외환은행이 현대차의 1차 타깃이 됐다. 외환은행은 채권단 내부에서 현대그룹 자금조달계획에 논란이 벌어졌는데도 단독으로 MOU 체결을 밀어붙였었다. 현대차는 외환은행에 대한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MOU체결을 진행한 은행 실무 담당자를 입찰방해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가 하면 현대차의 외환은행 법인계좌를 폐쇄하고 자금을 모두 인출했다. '적군에 협조하는 자와는 거래를 끊겠다'는 엄포이자 신속·과감한 액션이었다. 

외환은행을 단속해 놓은 현대차는 화살을 현대그룹으로 돌렸다. 현대차는 보도자료를 내고 "대출계약서 없이 대출확인서만 제출하고 소명을 다했다는 현대그룹의 태도는 채권단 뿐 아니라 금융당국, 국회, 나아가 국민을 기만하는 처사"라며 "현대그룹이 제출했다는 확인서는 법적 효력이 있는 문서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현대차는 또 "항간에 (나티시스 예금이) 자금증빙만을 위한 초단기, 고율의 일시대출이니, 제3자의 담보나 보증이 들어간 것이니 하는 등의 의혹이 무수히 제기되어 있는 만큼 현대그룹은 대출계약서와 일체의 관련서류를 제출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현대그룹은 역공에 나섰다. "현대차가 마치 채권단인양 효력이 있니 없니  떠드는 것은 입찰 참여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넘어선 것”이라고 비난하며 "현대차가 입찰방해행위를 한만큼 예비입찰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그룹이 뭔가 캥기는 것이 많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자, 대세를 뒤집기는 어려웠다. 현대그룹이 자료제출 거부 입장을 굽히지 않자, 채권단은 결국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박탈했다. 그리고 현대차그룹에 현대건설을 넘기기로 결정했다. 이듬해인 2011년 1월 현대그룹은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이후 계약보증금(2700억) 반환소송을 내, 일부승소 판결을 받음으로써 2000억원 정도를 회수하게 됐다.

◇ 이겼으면 더 문제?..새옹지마일 수도 

▲ 서울 연지동의 현대그룹 본사

현대그룹은 당시의 상황을 아쉬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5조 5000억원의 인수자금 중 적어도 4조원 이상을 차입해야했던 현실, 이후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와 구조조정, 줄줄이 적자에 빠진 계열사 실적 등을 감안하면 당시의 쓰라린 경험은 새옹지마가 됐을 지도 모른다.


현대그룹은 최근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 현대로지스틱스(옛 현대택배), 현대상선 LNG사업을 매각하는 등 3조원에 가까운 구조조정 자구안을 이행하고있다. 현대증권 등 금융사들도 매물로 내놓았다.

과거 대규모 분식과 부실을 숨기고 있다 들통나는 바람에 온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A그룹은 채권단의 출자전환과 채무조정, 자체 구조조정 등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룹이 정상화되자 A그룹 일부 경영진은 "당시 외부투자 유치 등 내부적으로 위기극복 방안을 마련중이었기 때문에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필자는 A그룹이 만약 외부에서 눈치못채게 자력 해결을 추진했더라면 3~4년 내 거의 해체되는 운명을 맞았을 것으로 판단한다. 부실이 부실을 낳고, 분식이 분식을 낳는 상황을 되풀이하다 암이 온 몸에 퍼진 뒤 결국 수술대에 올랐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현대건설 인수 실패는 현대그룹에게는 오히려 약이 됐다고 본다.  현대건설 인수를 진두지휘했던 현대그룹 고위 경영진은 당시 양해각서 해지금지 가처분 소송을 다루는 법정에서 "프랑스 나티시스 은행에서 빌린 1조2000억원은 브릿지론(Bridge loan)으로 보면 된다"고 밝혔다. 돈의 성격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었다. 브릿지론은 자금을 충분히 모으는데 시일이 걸릴 경우 단기 차입 등으로 필요 자금을 일시 조달하는 대출을 말한다.

그는 "대형 글로벌 M&A에서 일단 브릿지론을 얻은 뒤 재무적투자자(FI)나 전략적투자자(SI)와 협의가 완결되면 대출을 투자 형태로 대체하는 것이 널리 행해지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브릿지론이라고 해서 은행이 아무런 담보나 보증없이 거액을 신용으로만 내주지는 않는다.

현대그룹이 FI나 SI를 무리없이 잘 유치할 수 있었으리란 보장도 없다. 특히 FI에 대해서는 수익보장용 풋백옵션을 약속해줘야 했을 것이다. 무리한 FI 유치와 풋백옵션 보장은 '승자의 저주'라는 부작용을 야기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당시 현대그룹은 동양증권으로부터 8000억원의 인수자금을 조달키로 했는데, 여기에도 풋백옵션이 걸려있었다.    

현대그룹이 최근 수년간 경영권 방어를 위해 국내외 투자자들과 맺은 옵션계약 때문에 손실을 입어왔고 앞으로도 상당기간 주요 계열사들의 구조조정과 재무구조 개선 작업이 필요한 현실을 고려하면, 현대건설 인수 실패가 훗날 몸에 좋은 '쓴 약'이었다는 평가를 스스로 내릴지도 모르겠다.

 

**[재계를 바꾼 M&A] 기획 시리즈는 외부 전문가와의 협업(co-work)을 지향한다는 편집 방향에 맞춰 외부 기고를 통해 작성됐습니다. 본 기사는 김수헌 글로벌모니터 대표(fntom@naver.com)가 취재 및 작성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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