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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를 바꾼 M&A] SK, 하이닉스를 품다

  • 2014.11.30(일) 08:05

① 힘든 시절 겪은 하이닉스와 SK..M&A로 윈윈

삼성-한화간 '빅딜'은 재계를 깜짝 놀라게 한 빅 이슈였다. 두 그룹간 '윈-윈'전략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대세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 경기전망을 감안할 때 방위산업과 유화업체 M&A(인수합병)에 2조원이나 투입하는 것이 타당하냐는 지적도 없지 않다. 재계 역사를 돌이켜보면 대기업의 명운을 갈라놓은 M&A가 적지 않았다. 덩치가 큰 딜(Deal)일수록 스토리도 흥미진진하다. 재계 지형를 바꿔놓은 M&A의 배경과 숨겨진 이야기, 의미를 정리해본다.[편집자]

▲ 2012년 3월 26일, 경기도 이천시 하이닉스 본사에서 열린 'SK하이닉스 출범식'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내빈들이 SK하이닉스의 본격 출범을 알리는 퍼포먼스를 갖고 있다.

 

2002년 4월30일 오후 3시를 약간 넘어선 시각. 시장에 빅 뉴스가 전해졌다. 진원지는 서울 대치동 하이닉스반도체 사옥. 이곳에서는 이날 아침 8시부터 사내외 이사 전원(10명)이 참석한 가운데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사회 안건은 미국의 메모리반도체 기업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제안한 하이닉스 인수안 검토와 의결. 말이 좋아 검토였지, 사실은 통과를 위한 형식적 절차쯤으로 인식됐다. 외부의 시각은 그랬다.

◇ 다 된 밥?..뚜껑 열기전엔 모른다

마이크론과 하이닉스 채권단은 이미 일주일 전 매각 양해각서(MOU) 내용에 잠정합의했다. 하이닉스 이사회만 통과하면 당시 세계 3위의 국내 메모리 기업이 마이크론으로 팔려가는 상황이었다. 오전에 끝날 것으로 예상됐던 이사회가 오후로 이어졌다. 그러자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이야기들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3시가 조금 넘었을까, 이사회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증권시장에 급속하게 퍼졌다. 이사 전원이 만장일치로 매각 MOU를 부결시켰다는 것. 채권단 공동관리를 받는 기업의 이사회가 채권단의 결정을 뒤엎는 사상 초유의 사달이 났다. 

이사회 소식이 전해진 뒤 미국 유력경제매체 포브스는 "(하이닉스가)마지막 생명줄을 포기했다"고 논평했다. 더 심한 질타와 혹평이 이어졌다. "사망신고서에 스스로 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도 나왔다. 

사실, 이사회에서의 부결 조짐이 사전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이닉스는 이사회 며칠 전 '독자생존 방안 보고서'를 채권단에 제출했다. 마이크론은 앞서 채권단에 인수대금을 자사 주식으로 지급하겠다고 했다. 인수 전 대규모 채무조정을 요구했다. 더 나아가 마이크론에 대한 신규운영 자금 대출까지 요청했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감안하면 차라리 독자생존 추진이 더 낫다는 게 하이닉스의 이사회의 의견이었다. 한마디로 채권단과 하이닉스, 국익 어느 곳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굴욕적' 협상이라는 지적이었다.

◇ 쌍용차가 탈락한 사연 

▲ SK그룹 최태원 회장

그 해, SK그룹은 쌍용자동차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10년 뒤 세계 2위 메모리반도체 기업 하이닉스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못한 채. 2002년 하이닉스는 헐값 해외매각에 저항하고 있었고, SK는 그룹의 새로운 캐시카우를 자동차 분야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SK그룹 재무, 전략기획담당 임원들은 2002년 하반기부터 쌍용차 탐구에 들어갔다. 최태원 회장 등 그룹 수뇌부로부터 쌍용차 인수를 검토해 보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 자동차와 SK그룹의 주력사업인 정유(에너지), 이동통신사업 간 판매 마케팅 시너지에 SK그룹은 주목했다. 특히 현대차처럼 자동차 제조 판매와 금융까지 잘 엮는다면 그룹의 신규수익사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듯하다.  

 

당시 쌍용차는 워크아웃 기업이었다. 1998년 대우그룹에 인수됐지만, 곧 대우가 무너지면서 대규모 감자와 채권은행들의 출자전환이 진행됐다. 채권단은 해외매각을 추진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래서 독자생존과 매각재추진을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SK그룹은 쌍용차 가치를 대략 7000억~1조원 수준으로 분석했다. EBITDA(이자, 법인세, 상각비를 빼기 전 영업이익) 배수를 12~14배, PER(주가수익비율)을 4~7배 적용했을 때 추정한 가격이었다. 쌍용차 인수결정에는 좀 더 따져봐야 할 요소들이 있었다. SK가 자체 평가한 가격에서 은행들이 얼마나 디스카운트를 해줄 지, 기존 사업과 시너지 효과가 어느 정도나 될 지, 자동차사업에서 큰 리스크가 발생할 경우 SK가 그룹 차원에서 얼마나 컨트롤 가능할 지 등에 대한 고민이었다.

실무진은 결국 '부정적' 검토 의견을 내놨다. 채권단은 반드시 쌍용차를 매각해야 겠다는 의지가 부족했다. 따라서 인수 가격을 낮춰줄 가능성이 적었다. 쌍용차의 생산규모나 판매네트워크는 SK그룹의 정유 통신사업과 시너지를 내기에 다소 빈약했다. 중고차 정비(스피드메이트)와 수입차 판매 외에는 자동차 관련사업 경험이 없었던 SK그룹은 자동자 제조업의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부족했다. 당시 SK그룹의 판단은 이러했다.

 

◇ 시운(時運)..그 땐 아니었다

 

2002년 SK가 하이닉스와 인연을 맺지 못하고, 2012년에 가서야 운명적 결합을 이룬 것은 ‘천운’이었다. 그 해 SK가 반도체사업에 뛰어들겠다는 야심으로 하이닉스를 인수했더라면, SK는 하이닉스를 다시 토해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2003년 초 SK그룹은 한국 재계, 아니 경제계를 뒤흔든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사태를 맞는다.

그룹 구조조정본부에 대한 검찰의 전격 압수수색 이후 SK글로벌의 대규모 분식과 부실이 드러났다. 그룹 전체가 휘청이고 ‘소버린’이라는 해외투자회사와 경영권 분쟁을 벌어야 하는 백척간두 상황에서 하이닉스에 대한 신규투자가 가능했겠는가.

SK가 하이닉스에 애정을 가지고 접근한 건, 2011년이다. 하이닉스는 2002년 마이크론에 대한 매각 결렬 이후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임금동결, 설비 리모델링과 업그레이드 등을 통한 경영혁신에 매달렸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다보니 생존법을 알게 됐고, 혁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구조조정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를 늘 체감해왔다. 이런 요소들은 전세계 메모리업계에 몰아닥친 가혹한 치킨게임 속에서도 하이닉스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기반이 됐다.

2011년 채권단이 하이닉스에 대한 세번째 매각작업에 들어갔을 때, SK는 하이닉스의 이러한 생존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 무렵 SK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2003년 이후 그룹 최대 시련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SK그룹 계열사들의 재무 사업구조 등 전반적인 생존력 역시 크게 강화됐다. SK는 ‘생존’과 ‘지속가능성’을 넘어 ‘성장’을 유지하기 위한 비즈니스 발굴에 고민하기 시작했고, 메모리 반도체 사업 진출이라는 결단을 내렸다. 

 

◇ M&A로 써 내려온 SK 성장사 

 

SK는 기본적으로 M&A로 성장해 온 기업이다.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은 "STX가 M&A로 컸다"는 표현을 싫어했다고 한다. 부실기업을 M&A 한 뒤 우량기업으로 변신시킨 것이지, M&A 자체로 성장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은 해체의 운명을 맞고 말았지만, STX그룹은 한때 재계의 부러움과 시샘을 한몸에 받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던 기업이다. 

이에 비해 SK그룹은 비교적 탄탄한 공기업을 인수해 그룹 규모를 키웠다. 70년대 섬유를 주력으로 하다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 주력을 정유와 석유화학으로 바꿨다. 재계 순위도 10위에서 5위권으로 뛰었다. 그 뒤 에너지 사업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 통신서비스를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정했다.

1992년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선정됐지만 특혜시비와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자 사업권을 반납했다. 그러나 2년뒤인 1994년 한국이동통신 인수에 성공했고, 2000년에는 신세기통신까지 거머쥐면서 정보통신서비스사업을 그룹의 양대 주축으로 끌어올렸다.

수익성이 보장된 공기업을 인수해 키운 SK가 하이닉스 M&A에 뛰어들 때 느꼈을 리스크 압박감을 상당히 컸을 것이다. 반도체 실적은 업황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특히 메모리 산업에 대해 혹자는 돈 놓고 돈 먹기 '도박'산업이라고까지 표현한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대규모 시설 및 연구투자를 해야 한다.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할 당시 반도체 가격 흐름도 그리 좋지 못했다.

SK그룹 직원들 중 일부는 하이닉스로 발령날까 걱정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SK그룹은 오히려 이 시점을 투자의 적기로 판단한 듯하다. 설비와 연구개발투자에 4조원 가까이를 투입했다. 결과는 어떤가.

 

◇ 하이닉스로 날개 달다

 

▲ SK하이닉스 박성욱 사장

올해 들어 SK하이닉스 분기 영업이익은 계속 1조원을  넘어서고 있다. 매분기마다 사상 최대 실적을 갈아치우고 있다. 지난 3분기에 1조3000억원이 조금 넘는 영업이익을 내면서 3분기까지 누적 영업이익은 3조4000억원을 웃돌고 있다. 4분기 영업이익을 합하면 연간 5조원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증권시장에서는 현대차와 시가총액 다툼을 벌이고 있다. SK그룹의 여타 주력 계열사들은 성장세가 주춤하거나 퇴보하고 있다. 하지만 하이닉스의 그래프는 위로 쭉쭉 뻗어가고 있다. "하이닉스를 인수하지 않았으면 어떡할 뻔 했느냐"는 SK그룹 관계자들의 이야기는 이제 새삼스럽지 않다. 

 

SK하이닉스를 이끄는 박성욱 사장은 엔지니어 출신이다. 과거 현대전자 시절 반도체연구소로 입사한 후 대부분을 연구소에서 지냈고, 사장으로 취임하기 전에도 연구개발을 총괄하는 자리에서 일했다. 2년전 처음 취임할 때는 경영이나 대외활동에 다소 약점이 있지 않느냐는 시각도 있었지만 실적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이면서 회사는 물론 그룹 내부의 평가도 긍정적이다.


가장 잘된 M&A는 피인수기업의 임직원들이 인수기업 문화에 잘 동화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SK의 하이닉스 인수는 최고점을 받을 만하다.  2000년대 초반 급격한 유동성 위기 이후 오랜 풍파속에서 만들어진 하이닉스 '생존력'의 가치를 인정한 SK의 안목이 하이닉스를 그룹의 주력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재계를 바꾼 M&A] 기획 시리즈는 외부 전문가와의 협업(co-work)을 지향한다는 편집 방향에 맞춰 외부 기고를 통해 작성됐습니다. 본 기사는 김수헌 글로벌모니터 대표(fntom@naver.com)가 취재 및 작성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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