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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그림자'와 싸웠던 현대차 '55일의 굴곡'

  • 2018.05.21(월) 20:00

올 3월말 지배구조 개편 발표로 야심차게 출발
엘리엇 등장 반전…주총 8일 앞두고 결국 철회

2015년 9월, 옛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후유증을 지금도 겪고 있는 삼성의 짙은 그림자와 싸웠던 것일까. 

현대자동차그룹이 올해 3월 말부터 야심차게 추진해온 지배구조 개편 방안을 발표 55일만에 전격 철회했다. 개편 방안의 첫 단추인 분할합병안을 다룰 현대모비스-현대글로비스 주주총회를 단 8일 남기고서다.

심상찮은 주주들의 반대 여론에 '플랜 B'까지 고려 안해 본 건 아닐 테지만 일단 접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무리수를 두고 관철시켰다가는 지금껏 줄곧 지켜봐온 통합 삼성물산의 잡음에 자신이 시달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을 터다.

결국 직진을 강행하기보다는 우회로를 택해 전열을 가다듬는 게 낫다는 판단이 '일보 후퇴'라는 결단의 배경이었던 걸로 보인다. 55일간의 '굴곡' 속에 시간이 흐를수록 삼성 그림자가 점점 더 길고 짙게 드리워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 현대차 '후진적 순환출자 해소'…팡파르 울렸지만

 

출발은 좋았다. 현대차가 지난 3월28일 발표한 지배구조 개편 방안은 정부가 권고해온 순환출자 구조에 가장 큰 방점이 찍혀 있었다. '재벌 저승사자' 김상조 위원장이 통솔하는 공정거래위원회와도 사전교감이 있어보였다.

 

공정위는 현대차 개편안이 나오자마자 긍정적 반응을 내놨다. "현대차 기업집단이 시장의 요구에 부응해 지배 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에 대해 긍정적으로 본다"는게 공식 멘트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공정위는 현대차그룹은 올 3월말까지 순환출자를 깰 방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지배구조 개편이 정의선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와 얽혀있는 부분은 재벌에 비판적인 여론 측면에서 부담이었다. 정 부회장은 지배구조 정점에 서게 되는 모비스 지분을 전혀 갖지 않고 있었지만, 분할합병 후 덩치가 작아진 존속 모비스 지분을 매입하는 것이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런 부담도 이겨내는 듯 보였다. 개편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정몽구 회장과 정 부회장이 내야할 양도소득세만 1조원 넘고, 모두 합치면 1조5000억원 세 부담을 져야한다는 논리가 여론으로부터 상대적 호평을 받았다.

 

여태껏 있었던 대기업 오너 납부액 중 최대 세 부담이라는 분석과 함께 승계를 위한 '꼼수'가 아니라 낼 돈은 내는 '정공법'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지배구조 개편이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태와 엮이고 만 삼성과 견줘 "현대차는 다르구나"라는 말도 들렸다.

 

현대모비스와 현대차는 주주 표심을 사기 위해 주주친화정책도 잇달아 발표했고, 사업적 장밋빛 청사진도 제시했다. 현대모비스를 그룹내에서 소프트웨어, 인공지능(AI), 미래차 분야에서 핵심 기술을 선도하는 회사로 만들어 기업가치를 키울 것이라는 게 핵심이었다.

 

 

◇ 엘리엇이 몰고온 먹구름…그리고 의결권 자문사들

 

하지만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3년 전 삼성물산 합병 때 어깃장을 놨던 행동주의 헤지펀드 미국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등장이 그 서막이었다.

 

시작부터 강하진 않았다. 엘리엇은 현대차 개편방안 발표 후 1주일 가량 지난 4월4일 "현대모비스, 현대차, 기아차 주식을 총 1조원어치 가량 가지고 있다"며 "개편 시도가 긍정적이지만 추가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는 정도로 접근해왔다.

 

이후 현대모비스가 투자자들과 접촉해 분할합병의 방식과 비율 산식 등을 설명하고 난 뒤부터 엘리엇은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현대모비스 주주로서, 또 현대차와 기아차 주주로서 지배구조 개편이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는 주주제안을 내놓은 것이다. 골자는 현대모비스와 현대차를 합병한 뒤 이를 분할해 지주회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정부는 현대차 손을 들었다. 김상조 위원장은 엘리엇 제안에 대해 "현행 공정거래법과 맞지 않는다"는 입장까지 내놨다. 이때만 해도 현대차가 내놓은 지배구조 개편안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아보였다.

 

그러나 점점 전세(戰勢)는 흐릿해져 갔다. 국내 의결권 자문중 서스틴베스트가 지난 10일 분할합병 비율을 문제 삼으며 "기존 모비스 주주에 불리한 방안인 만큼 주주들은 반대표를 행사하는 것이 맞다"는 요지의 의견을 내놓은 게 신호탄이었다.

 

이틑날 엘리엇은 분할합병안에 반대표를 행사할 것을 공식화했다. 외국인 투자자를 중심으로 반대 세력을 모으겠다는 으름장도 함께였다. 이어 14일과 15일에는 해외 양대 자문사인 글래스 루이스와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가 각각 모비스 주주들에게 '반대(Against)'할 것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던졌다.

 

현대모비스 외국인 지분율은 47.7%. 이들의 의결권을 좌우하는 두 자문사의 이 같은 의견은 현대차그룹에 큰 타격이었다.

 

 

◇ '삼성의 그림자' 탓?…국민연금마저

 

현대차가 믿을 구석이라곤 국내 주주들밖에 없었다. 가장 큰 '비빌 언덕'은 최대주주 등 우호지분(30.13%)에 이은 2대주주 국민연금(9.82%)이었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자문계약을 체결한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마저 17일 국민연금 등 모비스 주주에게 주주총회에서 반대할 것을 권고했다. 그나마 힘을 보탤 수 있는 '캐스팅 보트'라고 여겼던 국민연금마저 손발이 묶인 것이다.

 

특히 국민연금은 옛 삼성물산 합병 때 찬성표를 던진 것에 아직까지 진통을 앓고 상황이었다. 국민연금 찬성 여부가 흐릿해지면서 현대차그룹도 표결까지 갈 동력을 잃게 됐다. 결국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는 21일 긴급 이사회를 열어 분할합병 계약을 해지키로 했다. 29일 예정된 주주총회도 철회했다.

 

현대차그룹 입장에서는 생각 하기 싫은 '플랜 B'를 만들어야 할 상황이 됐다. 기존 구조에서 분할합병 비율을 손보는 방안, 모비스를 분할한 후 두 회사 모두 상장해 글로비스와 시장가격으로 합병하게 하는 방안 등이 시장에서 거론된다. 어떤 방식이든 순환출자 해소와 경영권 유지를 하면서도 주주들로부터 찬성표를 받아야 하는 게 이제부터 숙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더욱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여러 의견과 평가들을 전향적으로 수렴해 사업경쟁력과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지배구조 개편방안을 보완해 개선토록 하겠다." 분할합병 방안 철회 공식화 직후, 정의선 부회장이 내놓은 말에는 안타까움이 뚝뚝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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