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7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결심공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자신이 쓴 최후진술서를 읽어내려갔다. 이 부회장은 "실타래가 엉망으로 꼬였다", "바닥까지 떨어진 신뢰를 어떻게 되찾을지 생각하면 막막하다" 등 10개월간 수감생활을 하면서 가슴 속에 쌓아둔 말을 A4 용지 한장 반 분량으로 풀어냈다.
눈길을 끄는 건 기업인으로서 그가 밝힌 포부다. 이 부회장은 "이병철 손자나 이건희 아들이 아닌 선대 못지않은 기업인으로 인정받고 싶었다"고 했다. 재벌 3세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지냈을 그였지만 그 역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지닌 평범한 사람 중 하나였다. 욕구는 결핍의 또다른 이름이다. 자산규모 399조원, 국내 1위 재벌의 맨 꼭대기에 앉아있는 그에게도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다.
이 목마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 부회장은 처음부터 출발선이 달랐다. 그렇기에 최후진술 첫머리에 자신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빚이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 지난 2월 항소심에서 징역 2년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오고 있다./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부채의식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이재용은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아버지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61억원을 받았다. 이 돈이 삼성을 물려받는 종잣돈이 되리라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 부회장은 먼저 에스원과 제일기획, 삼성엔지니어링 등 비상장사의 주식이나 주식연계채권을 사들인 뒤 상장차익을 남기는 식으로 승계자금을 불렸다. 결정적으로 주목을 받은 사건은 삼성에버랜드와 삼성SDS의 주식을 인수할 때 생겼다.
에버랜드는 지금의 삼성물산으로 삼성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회사다. 곧 삼성물산을 지배하면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출자구조를 통해 삼성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현재 삼성물산의 최대주주는 지분 17.08%를 보유한 이 부회장이다. 그는 1996년 에버랜드가 발행한 전환사채(CB)를 인수한 뒤 주식으로 바꿔 지금의 승계기반을 마련했다. 당시 이 부회장이 CB 인수에 들인 돈은 48억원. 이 돈이 20여년이 흐른 지금에는 삼성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삼성SDS는 지배구조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크지 않다.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이 부회장이 보유한 삼성SDS 지분(9.2%,시가 1조5016억원)은 상속재원으로 활용하기에 적당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부회장은 1996년 삼성SDS 지분을 처음 매입한 뒤 1999년에는 이 회사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인수했다. 두 차례의 인수에 들어간 돈은 100억원을 넘지 않는다. 특히 BW와 관련된 일은 나중에 삼성 특검으로 번져 이건희 회장이 유죄판결(2009년 8월)을 받는 걸로 끝난다. 이 회장은 넉달 뒤 특별사면을 받았지만 이 부회장으로 승계과정에는 흠이 남았다.
실제 삼성 승계과정에서 불거진 숱한 비판은 쌓이고 쌓여 결국 아들의 구속(2017년 2월)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2015년 이뤄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등이 문제가 됐다. 삼성은 당시 합병은 승계와 무관하다고 항변했음에도 이 부회장은 약 1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시간을 거슬러 다시 24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삼성은 어떤 결정을 할까.
현재 정부와 국회는 '보험업법 개정'이라는 칼을 들고 '삼성생명→삼성전자'의 출자고리를 끊으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삼성생명은 18조원어치의 삼성전자 주식을 팔아야 한다. 삼성 저격수로 불린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현재의 출자구조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며 "결국 이 부회장이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 삼성 후계자로서 이 부회장이 받는 스포트라이트만큼 그가 짊어져야할 짐이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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