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화학과 같은 장치산업은 언제 투자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막대한 투자비가 들더라도 미리 설비를 갖춰놔야, 시황이 좋아졌을 때 본 실력이 드러납니다."
정유, 화학사가 어려운 시황에도 과감한 설비투자를 진행 중이다. 미리 설비를 갖춰놔야 시황이 좋아졌을 때 어려웠던 시기를 만회하고도 남을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건이 좋을 때를 기다려 투자를 시작하면 시기를 놓칠 수 있다. 설비를 짓는데 최소 3년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다.
다만 정유사와 화학사의 투자방향은 결이 다르다. 정유사는 사업 포트폴리오 강화 차원에서 비정유사업으로 외연을 넓히고 있다. 화학사는 설비투자를 통해 규모의 경제를 구현하면서도 사업 외연을 확장하는 동시 전략을 쓰는 중이다.
◇ 정유사, 화학사로
정유사는 원유에서 짜낸 기름을 알뜰하게 재사용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안했다. 기름 찌꺼기인 중유를 휘발유로 탈바꿈해주는 고도화시설, 원유에서 뽑아낸 무거운 나프타를 투입해 합성수지 및 합성섬유 원료 등을 만드는 방향족 설비 등 투자를 거듭했다.
최근 들어 정유사들은 방향족을 넘어 그간 국내 화학사들의 전유물인 올레핀 사업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여러 화학제품에 두루 쓰이는 에틸렌 등을 만드는 올레핀 공정에 필요한 가벼운 나프타를 본인들이 자체 소비하는 '수직 계열체계' 확립 차원이다. 그간 정유사들은 무거운 나프타는 본인들이 사용하고, 나머지 가벼운 제품은 화학사에 판매했다. 화학사는 이를 나프타 분해설비(NCC)에 넣어 제품을 생산하는 구조다.
정유사들이 NCC를 만들어 스스로 소비하면 원료 조달비를 줄이면서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더 알뜰히 만들 수 있다. 여기에 가격이 저렴한 부생가스, 에탄 등을 원료로 투입해 화학사가 보유한 NCC 대비 수익성 극대화도 꾀한다.
전기차가 확대되면서 휘발유, 경유 수요가 줄어들 것을 대비해 사업 포트폴리오 확대 차원이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전체 차량 대비 전기차 판매 비중은 올해 5.9%를 기록한뒤 2025년엔 23.3%로 4배 이상 늘어날 전망이다. 태양광, 풍력발전 등 신재생에너지 확대도 부담이다.
정유사가 화학사로 외연을 넓히는 것은 세계적 기류다. 최근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의 중동 최대 화학회사 사빅 인수, 미국 거대 석유기업 엑손모빌의 에탄분해설비(ECC) 확장 등이 대표적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정유사 주요 수입원인 차량, 발전용 연료유 판매량은 결국 줄어들 수 밖에 없다"며 "화학제품은 경제성장, 인구증가에 따라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기에 새로운 수익원을 찾는 셈"이라고 말했다.
눈에 띄는 점은 이 과정에서 화학사와의 합종연횡이 이뤄지는 것이다. 정유사들은 수십년간 업력을 쌓은 화학사들의 노하우를 전수 받는 등 기존 인프라를 활용해 안정적 설비가동을 담보할 수 있다. 화학사 입장에서도 원료를 저렴하면서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수급처를 확보하는 점에서 유리하다.
롯데케미칼과 GS에너지가 지난 15일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계약을 맺은 것이 대표적이다. 두 회사는 오는 2023년까지 총 8000억원을 투자 연간 비스페놀A(BPA) 20만톤, C4유분 21만톤 규모를 생산하는 공장(약 10만㎡ 부지)을 롯데케미칼 여수 4공장내 짓는 내용의 계약을 맺었다. BPA는 고기능 플라스틱 폴리카보네이트, C4유분은 추출과정을 거쳐 합성고무 원료 부타디엔 등에 쓰인다.
이 공장은 GS에너지 자회사 GS칼텍스가 추진하는 NCC의 한 종류인 MFC공장에서 원료를 조달할 예정이다. GS칼텍스는 전남 여수에 2022년 상업가동을 목표로 2조원을 투자해 MFC를 지을 계획이다. 원료 수급처를 확보한 만큼 이번 합작은 GS칼텍스는 물론 롯데케미칼 모두에게 '윈-윈'이란 평가가 나온다.
현대오일뱅크는 일찍부터 화학사와 합작사업을 진행했다. 현대오일뱅크는 지난해 5월 롯데케미칼과 손잡고 2조7000억원 규모 NCC의 한 종류인 HPC 공장을 추진 중이다. 현대오일뱅크 충남 대산공장에 들어서며, 2021년 상업가동이 목표다. 저렴한 원료를 사용해 올레핀 계열 제품을 만든다. NCC 대비 연간 2000억원 가량 수익성 개선 효과가 있을 것으로 회사는 기대하고 있다. 여기서 나온 제품은 롯데케미칼로 공급될 전망이다.
SK이노베이션은 자회사 SK종합화학이 중국 최대 석유화학 기업 시노펙(SINOPEC)과 합작해 만든 중한석화(지분 35대 65)로 화학사업 확장에 시동을 걸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이를 통해 중국 현지에서 아시아 기업 최초로 NCC 사업에 진출했다. 중한석화는 2020년까지 설비투자를 진행해 연간 110만톤 규모 에틸렌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다. 현지 2위 수준이다. 중한석화는 최근에는 시노펙 산하 정유기업 우한분공사를 2조2000억원에 인수해 안정적 원료 수급처도 마련했다.
S-OIL은 홀로 5조원 규모의 과감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S-OIL은 2023년까지 NCC의 일종인 스팀크래커, 여기서 나온 에틸렌 등을 투입해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만드는 올레핀 다운스트림 설비를 만든다. 공장은 울산시 온산공장 인근 약 40만㎡ 부지에 지어진다.
S-OIL은 최근에는 울산에 5조원을 투자해 지은 잔사유고도화설비(RUC)·올레핀하류설비(ODC) 준공식(약 48만5000㎡ 부지)을 열었다. 기름 찌꺼기 잔사유에서 휘발유, 프로필렌을 뽑아내 이를 다시 화학제품으로 만드는 설비다. 회사가 화학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진행한 창사 이래 최대 프로젝트다.
◇ 화학사, 규모의 경제 및 사업다각화
화학사도 설비투자에 집중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미국에 31억달러(약 3조6000억원) 규모 화학공장을 지었다. 이 공장이 준공되면서 회사의 전세계 에틸렌 생산규모는 연간 약 450만톤으로 국내 1위, 세계 7위권에 등극했다. 공장은 약 102만㎡ 부지 위에 세워졌으며, 5월중 상업생산에 들어간다.
롯데케미칼은 국내 정유사와 합작사업을 바탕으로 앞으로 더 화학사업 규모를 키울 계획이다. 특히 경기를 덜 타는 고부가 화학소재 사업을 키워 사업 다각화를 도모한다는 목표다. 롯데케미칼은 경기에 민감한 범용 화학제품이 주력이었다.
회사 관계자는 "정유사와 여러 합작사업을 진행한 것도 원료를 저렴하고 안정적이게 조달하기 위한 일환"이라며 "지속적으로 투자계획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LG화학도 적극적이다. 올해 2021년 하반기 가동을 목표로 전남 여수공장 확장단지내 2조6000억원을 투자해 NCC 연간 80만톤, 고부가 폴리올레핀(PO) 80만톤 증설을 진행 중이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은 고부가 제품 비중 확대, 해외 사업 확장을 위한 현지 업체와 전략적 제휴 및 인수합병 등 여러 가능성을 열어뒀다.
LG화학은 또 전기차 배터리 생산능력을 현재 35기가와트시(GWh)에서 2020년까지 100GWh로 키울 계획이다. 여기에 4조~6조원 가량이 투입될 것이란 전망이다.
여천NCC도 생산규모 확대에 나섰다. 2020년 상업운전을 목표로 7400억원을 투자해 NCC, 합성고무 등에 쓰이는 부타디엔 공장 증설에 나선다. 공장이 준공되면 에틸렌 생산능력은 연간 58만톤에서 91만5000톤, 부타디엔 생산능력은 연간 24만톤에서 37만톤으로 늘어난다. 이 회사는 한화케미칼과 대림산업이 각각 지분 50%를 지니고 있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결국 적기 투자가 중요하다"며 "불황기를 버텨 호황기에 제품을 제때 내보내는 업체들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