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애플 생태계'를 완성하는 데 한 발 더 다가섰습니다. 자체 개발한 반도체칩을 개인용 컴퓨터(PC) 제품군인 '맥(Mac)'에까지 탑재한 걸 두고 나오는 얘깁니다. 애플은 지금까지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애플워치에만 자체 개발 칩을 썼는데요. 맥을 포함해 모든 제품에 자체개발 칩을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한 신제품 출시 이상의 의미가 있어 그 맥락을 짚어볼 만합니다.
◇ '맥' 더 빨라진 게 다가 아니다
애플은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쿠퍼티노 본사 애플파크에서 온라인 영상(스트리밍)을 통해 독자 개발한 시스템온칩(SoC)인 '애플 실리콘 M1'을 탑재한 신제품을 공개했습니다. 시스템온칩이란 여러 기능을 가진 시스템을 하나의 칩에 구현한 기술집약적 반도체를 말합니다.
M1은 데스크톱·노트북 전용으로 컴퓨터 구동에 필요한 각종 칩을 한 데 통합한 것인데요. 8코어 CPU(중앙처리장치)와 8코어 GPU(그래픽처리장치), 16코어 뉴럴엔진(인공지능 기능), D램 등이 하나로 합쳐진 구조죠. 최신 반도체 제조공정인 5nm(나노미터) 공정을 채택한 애플의 첫 PC용 칩이기도 합니다.
칩을 하나로 통합하면 처리속도가 빨라지고 전력 효율성이 높아집니다. CPU, GPU, 뉴럴엔진 등이 메모리와 함께 칩 내부에 있기 때문에 데이터를 처리할 때 따로 데이터를 옮기거나 복사하지 않고도 메모리에 직접 접근, 처리할 수 있어 속도가 빨라지는 원리입니다. 전력 소모량도 줄어 배터리 사용 시간도 전보다 2배가량 늘었습니다.
애플이 이날 공개한 제품은 M1을 탑재한 '맥북에어'와 '맥북프로', 소형 데스크톱 '맥미니' 등 3종이었는데요. 신형 맥북에어와 맥북프로의 경우 종전 제품 대비 각각 최대 3.5배, 2.8배 빠른 CPU 성능과 최대 9배, 11배 빠른 머신러닝 연산을 제공한다고 합니다. GPU 성능은 모두 최대 5배 빨라졌고요. 맥미니 역시 기존 제품보다 CPU 성능 최대 3배, GPU 성능 최대 6배, 머신러닝 연산은 최대 15배 빨라졌다는 것이 애플의 설명입니다.
팀 쿡 애플 CEO(최고경영자)는 영상을 통해 "M1은 우리가 창조한 가장 강력한 칩"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는 "맥을 훨씬 더 빠르게 하고 놀라운 배터리 수명과 함께 새로운 능력을 제공하고 더 많은 소프트웨어를 구동하게 할 것"이라며 "이것이 맥을 애플 실리콘으로 전환하는 이유"라고 말했습니다.
◇ 인텔 종속 15년 만에 자체칩 회귀
최근 15년여 동안 맥은 인텔의 CPU를 달고 있었습니다. PC용 자체 프로세서인 '파워PC'를 써오다가 2005년 인텔의 코어 프로세서로 바꾸면서 PC 시장 확대를 시작했죠. 윈도우 기반 PC와 유사한 프로세서 아키텍처(컴퓨터 시스템 설계방식)를 도입해 개발자들이 윈도우 인기 앱을 쉽게 맥으로 가져올 수 있게 됐고, 이는 맥의 보편화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인텔의 CPU는 크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애플은 반도체 설계 회사인 ARM과 협업해 모바일용 기기에 들어가는 모바일 칩은 따로 개발해 사용했죠. 이게 이른바 '애플 실리콘'이라는 반도체 자체개발 프로젝트입니다.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워치에는 애플이 자체 개발한 칩을 사용한 반면 아이맥이나 맥북 등 PC에는 인텔의 반도체를 써왔던 겁니다.
애플의 '탈(脫) 인텔' 계획은 지난 6월 연례 개발자 행사(WWDC 2020)에서 이미 밝혀진 바 있습니다. 올해 안에 PC 제품에도 인텔 프로세서 대신 자체 개발한 칩을 넣겠다는 계획을 공개한 것이입니다. 당시 팀 쿡 CEO는 기조연설에서 "과거 PC용 프로세서를 IBM '파워PC'에서 인텔 '코어 프로세서'로 갈아타던 수준의 변화로 '게임 체인저(판을 바꾸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죠.
애플이 PC에서도 자체 칩을 설계하는 것은 그간 축적한 칩 설계·개발 기술이 PC로 확장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최근 인텔의 최신 칩 개발이 늦춰지며 애플이 맥의 성능 개선에 제약을 받았던 것도 자체 개발에 더욱 힘을 쏟은 배경으로 풀이됩니다.
◇ 의존도 낮추고 자체 매출 확보
애플이 '탈 인텔'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명확합니다. 이미 애플은 20%대의 영업이익률을 내는 '초고수익'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는데요. 일단 독자칩으로의 전환을 통해 인텔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자체 매출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맥 칩셋 공급 중단에 따른 인텔의 손실 규모는 20억 달러(2조2300억원)라고 합니다. 이는 인텔 연간 매출의 2~4% 수준이라고 합니다.
애플로서는 당장만 해도 외부 의존을 줄이면서 자체 매출을 키울 수 있는 겁니다. 업계에서는 애플이 탈 인텔을 통해 연간 8조4000억원의 매출을 더 거둬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요. 이는 지난해 애플의 매출 성장률보다 25%가량 많은 수준이라고 하네요. 애플이 2년에 걸친 자사 설계칩 전환을 마치면 이 매출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인텔의 종속에서 벗어나 애플만의 생태계를 더욱 강력하게 구축할 수 있다는 게 더욱 큰 기대 효과입니다. 지금껏 ARM 기반 프로세서를 쓰는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워치와 'x86' 아키텍처 기반의 인텔 프로세서는 아키텍처가 달라 상호 호환성이 떨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맥에도 ARM 기반 애플 실리콘을 탑재하면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에서 사용하는 앱을 맥에서 바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개발자들은 PC용, 모바일용 앱(App)을 따로 개발하지 않아도 돼 효율적이죠. 애플이 줄곧 강조해왔던 '애플 생태계'의 완성에 한발 더 나아가게 된다는 건 이걸 두고 하는 얘깁니다.
◇ 맥으로 완성하는 애플 '원 월드'
다시 말해 PC까지 자체칩을 탑재한다는 건 애플 제품 사이 연결성을 더욱 키운다는 얘깁니다. 애플을 사용하는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어떤 제품에서도 같은 사용환경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호환이 더욱 편리해지면 그렇지 않아도 소문난 애플 사용자들의 '응집력'은 한층 커질 수 있습니다. '아이폰'에서 확보한 대중성을 맥에까지 확대하면 모든 제품군이 더욱 경쟁력을 가지게 됩니다.
맥은 지난 2010년까지만 해도 애플 매출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지만, 아이폰이 주력이 되면서 점차 그 비중이 쪼그라들었습니다. 지난해 4분기에는 애플의 전체 매출 중 맥의 비중은 9.1%에 그쳤죠. 또 사용자가 '마니아'나 특수 직종에 한정되다 보니 전체 PC 시장 점유율도 낮았습니다. 시장조사업체 카날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애플의 PC 출하량은 322만대로 전 세계 PC 출하량의 7% 수준에 그칩니다.
업계에서는 애플 실리콘을 탑재한 맥의 탄생이 '맥의 부활'을 이끌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나옵니다. OS와 iOS의 연동이 용이해진 만큼, PC에서는 윈도우가 익숙해 맥으로 갈아타지 못했던 고객까지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죠.
시장에서도 이를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케이티 휴버티 애널리스트는 "애플이 새로 출시한 3개의 맥 모델은 최근 12개월 맥 전체 출하량의 91%"라며 "차세대 맥 모델이 내년까지 25%의 주당순이익 증가를 견인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JP 모건은 "애플이 기술 로드맵과 생산 규모 확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면서 원가 절감을 이루게 됐다"며 "애플 실리콘의 이점은 긴 시간 지속될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