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주주총회에서도 다수 바이오 기업이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감사 선임에 실패했다. 기업들은 감사 선임 시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3%룰' 때문에 의결권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들 기업은 현실적인 문제로 전자투표를 도입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한다. 반면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경영권을 놓고 표 대결을 벌이는 기업들이 일부러 전자투표 도입을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주주 지분 낮은데"…감사 선임 부결 바이오 속출
6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테라젠이텍스, 진바이오텍, 제놀루션, 라이프시맨틱스 등이 지난달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감사 선임에 실패했다. 이들 기업 모두 의결정족수가 부족해 안건을 상정하지 못했다. 또 지나인제약, 현대바이오, 디엔에이링크, 에스텍파마, 메타바이오메드, 덴티스 등은 의결정족수 미달로 주요 안건이 부결됐다.
상법상 사외이사나 감사 등 요건 미충족은 관리종목 지정 사유에 해당한다. 다만 주주총회에서 새로운 감사 선임에 실패할 경우 기존 감사가 임시로 임기를 이어갈 수 있다. 이후 회사는 신임 감사 선임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는 조항에 따라 3개월 내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하고 재선임 절차를 밟아야 한다.
바이오 기업들은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배경으로 3%룰을 꼽는다. 3%룰은 상장 기업의 감사나 감사위원을 선임할 때 지배주주가 의결권 있는 주식의 3%까지만 행사하도록 제한한 규정이다. 감사와 감사위원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소액주주의 권익을 제고하겠다는 취지로 지난 2020년 12월 도입됐다.
감사 선임은 주주총회 보통결의 사항이다. 보통결의 안건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총 발행주식수의 4분의 1 이상, 주주총회 참석 주주 의결권 과반수를 넘겨야 한다. 그러나 3%룰이 적용되면서 대주주 의결권이 제한됐고 의결정족수가 부족해 감사나 감사위원을 선임하지 못하는 사례가 늘었다는 게 기업들의 주장이다.
특히 신약 개발 바이오 기업은 대주주 지분율이 낮고 소액주주 지분율이 높은 편이다. 뚜렷한 수익원이 없어 연구개발(R&D) 비용을 외부에서 조달하기 때문이다. 상당수 국내 바이오 기업의 최대주주 지분율은 10% 안팎에 불과하다. 코로나19 이후 바이오 업종에 대한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소액주주 비중은 늘었지만 소액주주의 주총 참석률은 여전히 저조한 상황이다. 소액주주의 주주총회 참여가 적극적인 기업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한 곳은 감사 선임이 어렵다는 얘기다.
바이오 기업 관계자는 "생업에 종사하는 소액주주가 평일에 열리는 주주총회에 참석하기는 쉽지 않다"면서 "본사(연구소)가 지방에 있어 주총을 지방에서 열 수밖에 없거나 주총이 한꺼번에 몰리는 슈퍼 주총데이에 주청을 여는 바이오텍은 의결권을 확보하는 게 매우 힘들다"고 토로했다.
바이오사 "전자투표 도입도 현실적 한계"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다. 소액주주가 주주총회에 직접 참석하지 않고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기업이 전자투표를 도입하는 것이다. 정부는 보통결의 의결정족수를 완화해달라는 기업의 목소리를 반영, 지난 2020년 말 상법을 개정했다. 이에 따르면 전자투표 도입 시 총 발행주식수의 4분의 1 이상 요건은 충족하지 않아도 된다. 3%룰은 그대로 적용한다.
하지만 전자투표를 도입한 바이오 기업은 많지 않다. 기업들은 전자투표를 도입하는 데 현실적인 한계가 많다는 입장이다. 우선 비용 부담 문제가 거론된다. 전자투표를 도입하려면 한국예탁결제원이나 증권사에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는 데다 주주총회를 온·오프라인으로 병행하는 비용이 부담스럽다는 설명이다. 상법상 주주총회는 본점 소재지나 인접지에서 대면으로 개최하는 게 원칙이다. 비대면으로만 개최할 수 없다.
더욱 골치 아픈 문제는 전자투표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정관을 변경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관 변경은 보통결의 안건보다 통과 기준이 높은 특별결의 사항에 해당한다. 총 발행주식수의 3분의 1 이상, 주주총회 참석 주주 의결권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실제 랩지노믹스와 테라젠이텍스는 지난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전자투표 도입을 위한 정관 개정 안건을 올렸지만 의결정족수 미달로 부결된 바 있다. 테라젠이텍스는 이번 정기 주주총회에서 전자투표를 도입했음에도 감사 선임을 위한 의결정족수를 확보하지 못했다.
상장사, 전자투표 없는 '꼼수'로 주주제안 방어
반면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바이오 기업들이 일부러 전자투표 도입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기업들이 표 대결 변수를 줄이기 위해 전자투표를 꺼린다는 지적이다. 일반적으로 전자투표를 시행하면 주주총회 열흘 전부터 하루 전까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사전투표인 셈이다. 그런데 대주주 지분율이 낮은 기업의 경우 이 기간 주가를 끌어올리지 못하면 소액주주가 기업이 추천한 감사를 선임할 확률이 낮다.
한 금융투자 업계 관계자는 "요즘에는 삼성증권처럼 전자투표 등록 기업에 수수료를 무료로 제공하는 증권사도 있고 비용이 부담돼서 전자투표를 도입할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면서 "주가 흐름도 안 좋은 데 최대주주 지분도 낮으니까 원하는 감사를 선임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 전자투표를 도입 안 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실제 이번 정기 주주총회에서 의결정족수 미달로 안건을 상정하지 못한 디엔에이링크도 소액주주와 경영권 분쟁 중이다. 디엔에이링크는 전자투표를 도입하지 않았다. 소액주주와 갈등을 빚은 기업 가운데 전자투표를 도입한 곳은 오스코텍과 헬릭스미스 두 곳에 그쳤다. 주주제안 안건이 모두 부결된 젬백스링크, 감사 선임 안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주주제안 안건이 모두 부결된 아이큐어도 전자투표를 도입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무엇보다 국내 바이오 기업들의 이 같은 행보는 세계적 흐름에 역행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강화 기조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국내 역시 전자투표 의무화는 물론 전자주주총회 도입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전자주주총회가 이미 일반적으로 자리 잡았고 터키는 모든 상장 기업에 대해 전자주주총회를 의무화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3%룰 자체에 대한 의문도 제기한다. 3%룰이 경영 투명성 확보에는 긍정적이지만 그 효과에 견줘 기업이 져야 하는 부담이 과도하다는 주장이다. 주주총회를 성실하게 개최하고자 노력한 기업에 한해 3%룰을 완화해줘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전자투표 등 제도를 다 풀었으면 3%룰이 필요 없는 게 아니냐"며 "3%룰은 전 세계를 통틀어 국내에만 있는 규제로 자본 다수결 원칙에 역행하는 제도"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