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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시스, 누적 판매 100만대의 의미

  • 2023.09.23(토) 17:00

[워치인더스토리]
브랜드 독립 후 비약적 발전…글로벌 시장 겨냥
'대중차'에서 '럭셔리 브랜드'로 성공적인 전환

/그래픽=비즈워치

워치인더스토리는 매주 토요일, 한 주간 있었던 기업들의 주요 이슈를 깊고, 쉽고, 재미있게 파헤쳐 보는 코너입니다. 인더스트리(산업)에 스토리(이야기)를 입혀 해당 이슈 뒤에 감춰진 이야기들과 기업들의 속내를 살펴봅니다. [편집자]

프로젝트명 'BH'

지난 2007년 당시 자동차 담당 기자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 있었습니다. 현대차의 신차 프로젝트명 'BH'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공개될 것인가였죠. 현대차의 각종 이벤트 장소에서도, 실적발표 IR행사장에서도 BH는 빠지지 않는 질문이었습니다. 현대차 고위 임원을 만나도 질문은 늘 같았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소소한 답변 하나로 기사를 쓰곤 했습니다.

이토록 관심이 높았던 것은 BH가 현대차의 전략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현대차는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해외 생산 기지를 통해 시장을 지속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덕에 현대차의 글로벌 판매량은 매년 우상향했습니다. 하지만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독일과 일본 브랜드들은 럭셔리카를 앞세워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8년 출시된 제네시스 1세대 모델인 '제네시스 BH' / 사진=현대차

현대차는 BH를 변화의 변곡점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대중차' 이미지인 현대차가 BH를 시작으로 '럭셔리카'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오랜기간 기술 노하우를 축적한 만큼 이제는 현대차도 럭셔리카를 선보일 때가 됐다는 것이 당시 현대차 내부의 분위기였습니다. 현대차는 "BH에 현대차가 갖고 있는 모든 기술을 집약했다"고 강조할 정도였으니까요.

BH는 2008년 1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차명은 '제네시스(Genesis)'로 정했습니다. 제네시스는 '기원, 발생'을 의미합니다. 구약성서의 첫 편입니다. 흔히 '창세기(創世記)'로 불립니다. 천지창조,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노아, 아브라함, 야곱을 거쳐 요셉의 죽음 등 기독교적 인류의 시작을 다뤘습니다. 제네시스는 현대차에게 또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만만치 않은 현실

현대차는 제네시스 개발에 5000억원을 투자했습니다. 제작 기간만 4년이 걸렸습니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는 럭셔리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정몽구 당시 현대차그룹 회장의 특명이 있었기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지난 2005년 첫 시작(試作)차를 내놨지만 정 회장의 불호령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제네시스는 현대차의 첫 럭셔리카라는 상징성에 현대차의 모든 기술이 집약됐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로선 현대차 엠블럼이 아닌 다른 엠블럼이 달려 출시됐다는 것도 화제였습니다. 판매량도 좋았습니다. 출시 첫해 내수와 수출을 합쳐 총 5만27대를 판매한데 이어 2012년에는 6만7475대를 판매하는 등 성과를 냈습니다.

제네시스 1세대 모델에 부착됐던 로고. 당시 현대차 엠블럼을 떼고 제네시스 엠블럼을 장착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사진=현대차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제네시스의 상징성은 희석되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차는 제네시스 출시 이후 이렇다 할 후속작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지난 2015년 2세대 모델인 제네시스 DH를 선보였지만 현대차가 확실히 변화했다는 인상은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네시스는 어느덧 현대차의 럭셔리 브랜드로 인식되기보다 노후한 브랜드가 돼버렸습니다. 당초 현대차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겁니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가 제네시스 출시 이후 내부적으로 확실한 방향성을 잡지 못했다"며 "대중적 차만 만들던 브랜드에서 럭셔리카로 영역을 확대했을 때에는 그만큼 리스크도 크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제네시스의 포지션도 애매해 당시 현대차 내부적으로도 고민이 깊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시작

방향을 잃은 제네시스를 다시 바로잡은 것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당시 부회장)이었습니다. 정 회장은 지난 2015년 제네시스 브랜드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동안 애매했던 브랜드 포지션에 확실히 선을 그어주면서 독자적인 럭셔리 브랜드로 거듭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겁니다. 또 당시 EQ900 모델을 출시하면서 현대차 브랜드에서 제네시스 브랜드로 자연스럽게 '페이드 아웃'하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제네시스는 이후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네시스와 현대차 브랜드를 명확하게 이원화했습니다. 제네시스의 전략과 판매, 생산 등 모든 면에서 독립성을 보장했습니다. 그러자 서서히 성과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BH 출시 이후 이렇다 할 후속작을 보여주지 못했던 제네시스는 2015년 이후 다양한 신차들을 선보이면서 착실히 경쟁력 있는 라인업을 구축했습니다.

2015년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당시 부회장)은 제네시스 브랜드 독립을 선언했고 이후 제네시스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했다 /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실제로 제네시스는 2015년 브랜드 독립 이후 현재까지 세단 5종, SUV 2종, 전기차 3종 등 10개로의 라인업을 갖췄습니다. 타깃도 명확히 했습니다. BH 당시에는 막연했던 목표를 다시 구체화하면서 확실한 지향점을 제시했습니다. 제네시스는 렉서스 등 일본 럭셔리 브랜드들은 물론 독일차 3사를 경쟁 브랜드로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기술, 디자인 등의 측면에서 큰 변화를 줬습니다.

가장 큰 소득은 소비자들이 제네시스를 럭셔리 브랜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한때 수입차에 열광했던 국내 소비자들이 제네시스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제네시스 판매량은 계속 증가했습니다. 해외에서도 인정받았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시장조사업체 J.D. Power가 발표한 ‘2022년 신차품질조사(IQS)’에서 프리미엄 브랜드 가운데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누적 판매 100만대…또 다른 도전

최근 제네시스는 브랜드 출범 이후 올해 8월까지 국내 69만177대, 해외 31만8627대 등 글로벌 시장에서 총 100만8804대를 판매했다고 밝혔습니다. 2015년 정 회장이 브랜드 독립을 선언한 이후 7년 10개월 만에 거둔 성과입니다. 제네시스 누적 판매량 100만대가 갖는 의미는 큽니다. 현대차가 대중적인 브랜드라는 틀에서 벗어나 경쟁력 있는 럭셔리 브랜드를 갖추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현대차가 자신감을 갖게된 계기가 됐다는 점입니다. 사실 그동안 현대차는 글로벌 시장에서 오랜 기간 '가성비 좋은 차'로 소비자들에게 인식돼왔습니다. 한때 '제값 받기'를 선언하기도 했지만 글로벌 시장의 소비자들에게 각인된 현대차의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현대차는 여전히 독일과 일본 브랜드에 비해 한 수 아래로 취급됐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래픽=비즈워치

제네시스의 성공적인 시장 안착으로 이제 현대차도 독일과 일본의 럭셔리 브랜드들을 위협할 무기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특히 품질면에서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매년 소비자들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물론 오랜 기간 시장을 장악해왔던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에는 아직 못 미칩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격차를 빠르게 좁혀가고 있다는 점은 무척 고무적입니다.

제네시스는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는 2025년 이후에 출시할 모든 신차는 전기차로 내놓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중심이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만큼 새롭게 열린 시장에서 기회를 잡겠다는 생각인 겁니다. 어쩌면 제네시스가 글로벌 시장에서 럭셔리 브랜드의 대명사로 자리 잡을 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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