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취임 2년을 맞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앞길이 깜깜하다. 삼성전자의 핵심 사업인 반도체는 초격차 기술력 확보에 실패하며 위기론에 휩싸였고, 미래를 이끌 신성장동력도 눈에 띄지 않는 상태다. 관료화된 조직문화는 경쟁력을 잃었고, 9년째 이어진 사법리스크도 이 회장의 발목을 잡는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든 것을 바꾸라" 했던 혁신을 넘어설 '승어부(勝於父·아버지를 능가함)' 전략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취임 3년차가 된 이 회장의 앞에 놓인 과제를 되짚어본다.[편집자주]
뉴삼성 이끌 성장동력은
삼성전자를 둘러싼 위기론이 더 힘을 얻는 것은 미래 신사업에 대한 가시성이 부족한 탓도 크다. 삼성전자는 현재 반도체를 비롯해 모바일, 가전 등의 사업을 영위하고 있지만, 제2의 반도체가 될 만한 신사업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상태다. '뉴삼성'을 위한 발판이 부족한 셈이다.
현재까지 이재용 회장이 미래 먹거리로 정한 사업은 인공지능(AI)과 바이오, 전장(자동차 전기·전자장치), 로봇 등이다. 이 중 현재 가장 성과를 드러낸 사업은 '바이오'다. 최근 바이오의약품 CDMO(위탁개발생산) 기업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아시아 소재 제약사와 1조7028억원(약 12억4256만 달러) 규모의 초대형 위탁생산(CMO)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지난 7월 미국 소재 제약사와 체결했던 1조4637억 계약을 뛰어넘는, 창립 이래 역대 최대 규모 계약이다. 지난해 전체 수주 금액(3조5009억원)의 절반에 가까운 수준이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 누적 수주금액은 4조3618억원으로, 처음으로 4조원을 넘었다.
다만 아직 글로벌 시장에서의 존재감은 크지 않다. 업계에 따르면 작년 기준 글로벌 바이오의약품 CDMO 시장에서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점유율은 9.3%로 4위에 머무르고 있다. 점유율 1위인 론자(20.7%)와의 차이는 10%가 넘는다.
이와 함께 이 회장은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전장 관련 시장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지난 6일에는 필리핀 칼람바에 위치한 삼성전기 생산법인을 방문해 MLCC(적층세라믹콘덴서) 공장을 직접 살펴본 뒤 △AI(인공지능) △로봇 △전기차 시장 확대에 따른 '기회 선점'을 당부하기도 했다.
지난 2020년과 2022년에도 부산 삼성전기 사업장을 방문해 전장용 MLCC 등 미래 시장 선점을 위한 적극 대응을 주문한 바 있다. 2020년 당시 이 회장은 부산 사업장을 방문해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며 "선두에 서서 혁신을 이끌어가자"고 언급했다. 이어 "현실에 안주하거나 변화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며 "불확실성에 위축되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하자"고 강조했다.
자동차 전장·오디오 전문 업체 하만을 인수한 것도 전장 사업 확대를 위한 밑작업이었다. 삼성은 지난 2016년 '디지털콕핏'(디지털 계기판)과 카오디오 분야 세계 시장 1위 기업인 하만을 인수합병 한 바 있다. 인수 첫해인 2017년 6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지만, 지난해부터는 본격적인 성장 흐름을 탔다. 작년 하만은 연간 매출 14조3885억, 영업이익 1조1737억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반도체 위기에 M&A도 '감감무소식'
하지만 하만 인수 이후 신사업을 위한 대형 M&A 소식이 끊기며 미래 사업 구축에도 제동이 걸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앞서 올해 대형 M&A 계획을 공개하겠다던 한종희 삼성전자 디바이스경험(DX) 부문장(부회장)의 공언도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앞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4에서 한 부회장은 "삼성의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대형 M&A가 올해는 계획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이어 3월 주주총회에서도 "대규모 M&A는 현재 많은 상황 진척돼 있고 조만간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지난 9월 독일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는 말이 바뀌었다. 그는 M&A 관련 질문에 "M&A는 필수적이고, 지속해서 큰 것을 계획하고 있다"면서도 "빅딜은 여러 변수가 있고 넘어야 할 산이 많아 쉽게 의사결정을 못 하는 상황"이라고 답했다.
삼성전자의 빅딜이 올해에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여기에는 주력 사업인 반도체가 위기론에 휩싸인 탓도 있다. 캐시카우인 반도체 사업이 흔들리니, 쉽사리 M&A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터다.
미래 사업을 결단할 리더십의 부재도 높은 장벽이다. M&A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여느 때보다 확실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데, 현재 삼성은 이를 결정할 이 회장의 리더십에 제약을 받고 있다. 9년째 이어지고 있는 이 회장의 사법리스크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지난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위법하게 관여한 혐의로 2020년 9월 재판에 넘겨졌다. 이후 107차례 열린 재판 중 이 회장이 법정에 출두한 것은 96번이다. 대통령 순방 등에 동행하는 해외 출장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재판에 참석했다. 피의자 신분으로 매번 법정에 출두해야 하는 만큼, 회사 경영에 집중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 회장은 올 1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검찰이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 현재 항소심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지난 27일 취임 2주년을 맞은 이 회장은 다음날인 28일에도 법원에 출석했다. 이 회장은 지난 2022년 회장 승진 당일과 취임 1주년인 지난해에도 재판에 출석한 바 있다.
길어지는 사법리스크
재계에서는 이 회장의 사법리스크가 완전히 해소되기까지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빠르게 '책임경영'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게 이 회장의 등기이사 복귀다. 현재 이 회장은 4대 그룹(삼성·SK·현대자동차·LG) 총수 중 유일한 미등기 임원이다.
이 회장은 지난 2016년 10월 임시주총에서 사내이사로 선임됐지만, 2017년 12월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기소 돼 2019년 10월 등기이사 재선임 없이 물러났다. 이후 2년6개월의 징역을 살다 2021년 광복절 가석방으로 나왔지만, 특별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따라 취업제한 5년을 적용받았다. 2022년 8·15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지금은 취업제한이 해제된 상태지만 여전히 미등기 임원이다.
이에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등기이사로 복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가 경영 실적 악화, 노사 갈등 확대 등 여러 위기를 겪고 있는 만큼, 이 회장의 책임 경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등기이사에 이름을 올릴 경우 사법리스크로 몸을 사렸던 것과 달리 적극적인 경영 행보가 가능해진다. 상법 399조에는 '이사가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 또는 정관에 위반한 행위를 하거나 임무를 게을리한 경우, 회사에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등기이사가 기업 운영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이찬희 삼성준법감시위원장은 최근 발간한 준감위 연간 보고서에서 "사법리스크의 두려움에서 자신 있게 벗어나야 한다"며 "법률과 판례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경되는 것처럼, 과거 삼성의 그 어떠한 선언이라도 시대에 맞지 않다면 과감하게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다.[시리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