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LG디스플레이가 LG전자로부터 차입했던 1조원을 만기 도래 전 갚았습니다. 10개월이나 일찍 부채를 상환한 건데요. 사실 기업이 빌린 자금을 일찍 갚는 것은 이례적인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계열사 간 대규모 자금거래가 우리나라 경제사에 종종 '흑역사'를 남긴 터라 업계에서는 이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분위깁니다.

경영에는 '돈'이 든다
기업이 경영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죠. 인건비, 시설운용비, 미래를 위한 투자금 등 쓸 곳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를 기업 스스로 해결하기는 결코 쉽지 않죠.
그래서 기업들은 다양한 방안으로 자금을 조달합니다. 과거에 쌓아놨던 이익을 활용하기도 하고, 가지고 있던 자산을 팔기도 하죠. 기업 안에서 직접 소화하는 자금조달 방식으로 '내부조달'이라고 합니다.
내부에서 돈을 끌어오기 힘든 경우엔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거나 회사채를 발행합니다. 두 경우는 은행 혹은 투자자에게 매달 이자를 줘야 합니다.
주식을 발행하는 유상증자에 나서거나 차후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채권인 전환사채(CB) 및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을 발행해 자금을 융통하기도 하죠.
여러 계열사로 이루 기업 집단의 경우에는 계열사 간 차입금 거래 방식도 있습니다. 회사채처럼 공개된 시장에서 자금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법인이 나뉘어진 계열사 기업끼리 돈을 빌려주는 거죠. 차입 거래인 만큼 이자 역시 발생합니다.
이 방법은 비공개 혹은 그룹 내부 거래로 진행되기 때문에 시장에 알려지는 속도가 매우 늦죠. 차입금 규모가 적으면 외부에 굳이 알릴 필요도 없고요, 규모가 크더라도 계약 체결 이후 1일 이내에만 공시하면 되거든요. 그 전까지는 철저히 영업 기밀로 관리됩니다.
트라우마 된 계열사 간 돈거래
우리나라는 유독 계열사 간 차입금 거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합니다. 외환위기 당시 대우그룹의 몰락의 주범으로 지목된 게 바로 이 계열사 간 차입금 거래였거든요.
과거 대우그룹은 계열사 간 차입금 거래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촘촘한 공시의무도 있지 않았고요. 이 때문에 외부에서 보기에 대우그룹 개별 계열사들의 재무상태는 매우 건전했죠. 내부에서 돈을 돌려가며 빚으로 계열사를 유지시켰는데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빚을 감당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그룹 전체 부도가 발생한거죠.
이후 정부는 대우그룹의 전철을 남기지 않기 위해 기업, 특히 상장사의 투명한 경영활동을 강제하기 합니다. 공정거래법, 자본시장법 등을 손보면서 기업들에게 여러 공시의무를 부여한 것도 대우그룹 몰락 이후입니다.
관련 법 개정에도 계열사 간 차입금 거래는 우리나라 산업계에 계속해서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대우그룹이라는 흑역사가 워낙 큰 데다 계열사간 '돈' 거래가 경제를 흔든 경우가 이어져섭니다.
몇몇 사례를 살펴볼까요. 이제는 대한항공의 형제가 된 아시아나항공이 대표적입니다. 과거 금호그룹 산하에 있을 당시 금호그룹은 대우건설 인수라는 초대형 빅딜에 나섰죠. 이 때 필요한 자금은 당시 계열사였던 아시아나 항공이 자금을 빌려주는 형태로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금호그룹 인수 직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대우건설은 '빚더미' 회사가 됐죠. 이 파장은 모기업인 금호그룹에 영향을 미쳤고 돈을 빌려줬던 아시아나항공도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부실이 전이됐습니다. 이후 금호그룹은 물론 아시아나항공까지 유동성 위기가 발생했고 금호그룹은 사실상 해체됐죠. 또 아시아나항공은 10년이 넘는 기간 구조조정을 거쳐 한진그룹을 새 주인으로 맞았습니다.
계열사 간 돈 거래는 대주주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계열사들이 동원되는 핵심 요인으로도 지목됩니다. 제대로 된 경영활동이 아닌 대주주만을 위해 계열사들이 동원됐다는 겁니다. 지난 2020년 한진그룹이 경영권 싸움을 했을 당시 지주사인 한진칼은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으로부터 대규모 자금 차입에 나섰었죠. 한진칼 지분을 추가로 확보해 경영권 분쟁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문제는 당시 대한항공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았음에도 한진칼에 자금을 빌려줬다는 겁니다. 결국 대한항공의 나머지 주주들이 대주주 경영권 방어를 위해 손해를 보는 상황이 발생했고 당시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대주주 사익 편취 우려와 투자자 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을 내기도 했습니다.

LG디스플레이의 '빚 상환'이 '빛' 나는 이유
계열사 간 차입금 거래의 '흑역사'를 감안할 때 LG디스플레이와 LG전자 간 차입금 거래는 긍정적인 사례로 주목할만 합니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 2023년 3월 LG전자로부터 1조원을 6.06%의 금리로 빌렸죠. 빌리는 기간은 2026년 3월까지였고요. 2년동안은 이자만 내고 나머지 1년동안은 이자와 원금을 동시에 상환하는 게 맨처음 계약의 내용입니다. 애초 계약보다 10개월이나 일찍 빚을 갚은 거죠.
돈을 빌렸을 당시 LG디스플레이 상황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2021년 2조2306억원에 달했던 영업이익이 2022년에는 2조852억원의 영업손실로 돌아섰고요. 2023년에는 손실 규모가 2조5102억원으로 늘어났죠.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가 이어진 LCD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진 데다가 경기까지 부진했던 영향이었습니다.
이에 LG디스플레이는 OLED 중심으로 사업의 체질을 전환합니다. 이를 위한 대규모 투자가 동반돼야 했는데 이를 계열사인 LG전자로부터 빌린겁니다. LG디스플레이는 빌린 자금을 OLED 투자에 적극 활용했고 지난해부터 결과를 내기 시작했죠. 2024년 손실규모를 2409억원으로 대폭 줄였고요. 지난해 4분기 부터는 분기기준 흑자로 돌아선데다가 올해는 연간 흑자까지 바라보고 있습니다.
LG전자로부터 빌린 빚을 조기에 갚을 수 있는 체력도 OLED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마련됐습니다. 중국의 LCD 공장을 매각한 대금을 활용해 LG전자의 빚을 갚는 동시에 수백억원의 이자비용 역시 아낄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런 점에서 LG디스플레이와 LG전자간 차입금 거래는 '필요한' 돈이 '올바른' 곳에 쓰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흑역사' 기억에 좀더 치우쳐있는 계열사 간 대규모 차입금 거래 사례 중에서 빛이 나는 이유겠죠. 기업 입장에선 향후 상환 여력만 충분하다면 계열사 간 차입금이 충분히 활용할 만한 자금조달 방법이고요. 그런 점에서 LG디스플레이와 LG전자와 같은 선순환적인 케이스가 자주 목도되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