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으로 들어서면서 야당이 추진하는 상법 개정안이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야당은 재계와의 토론회를 여는 등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 이익을 포함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을 본격 추진하기로 했다.
자본시장에서는 주주 권한을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이 입법될 경우, 국내 증시에 반등 동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동시에 상법개정 효과를 뒷받침하기 위해선 상속세 완화와 투자자 세율 조정 등 세금 인센티브가 뒤따라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민주당은 오는 19일 상법개정안을 논의하는 토론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좌장을 맡고 오기형 민주당 의원이 발제를 담당한다. 재계에서는 대한상공회의소와 한국상장사협의회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민주당은 지난 11월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이익을 추가하는 상법 개정을 당론으로 정하고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정문 정책위 수석부의장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에 따르면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를 명문화한다는 것이 골자다. 이밖에 자산총액 2조원 이상 대형상장사는 이사를 선임할 때 집중투표제를 적용하고 감사위원 2명 이상을 분리선출하도록 한다. 또한 전자주주총회 도입을 의무화하고 사외이사의 명칭을 '독립이사'로 변경하도록 한다.
최근 박주민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상법 개정안도 논의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에 따르면 대규모 자산을 양도, 양수하거나 현물출자로 자회사를 설립할 때는 주주총회 특별결의를 거치도록 한다. 동시에 자회사 설립에 반대하는 주주에겐 주식매수청구권을 부여한다. 아울러 계열사 간 합병 등 주요 안건을 다룰 때는 최대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한다.
상법 개정안을 두고 학계에서는 소수주주들의 권한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생기는 것이라고 반겼다. 반면 재계에서는 소송 남발 등으로 경영권 침해가 우려된다면서 반대 목소리를 내왔다. 이에 따라 금융위원회는 대안으로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내놓기도 했다. 분할 합병이나 주식 교환을 할 경우 공시 의무를 강화하는 한편, 물적분할로 떼낸 자회사 상장을 추진할땐 모회사 주주에게 자회사의 신주를 우선 배정하라는 것이 골자다.▷관련기사: 상법 대신 '자본시장법' 개정 카드 제시한 금융당국…효과 있을까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됨에 따라 정부안은 동력을 상실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신에 민주당이 추진해온 상법 개정안 가결 가능성이 떠오르고 있다. 지금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한덕수 국무총리의 거부권 행사만이 유일하게 법 개정을 막아세울 수 있는 장치다.
자본시장에서는 일단 주주 권한을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을 반기는 분위기다. 그간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나 주주환원에 소극적이었던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주주환원에 나서면서, 저평가된 증시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란 기대감이 나온다.
A 자산운용사 대표는 "기업들이 주가를 방치하면 주주들에게 소송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적극적으로 기업가치를 개선하려고 노력할 것"이라며 "정부가 추진하던 밸류업 정책은 동력을 잃었지만 오히려 상법개정을 통해 밸류업을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하게된 셈"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적극적인 행동주의 여지가 커지고 운용사들의 옵션도 많아진다"며 "운용전략의 범위 확대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B 자산운용사 국내주식형펀드 운용 매니저는 "국내 기업들의 미국 대비 글로벌 경쟁력이 높지 않은 상황에서 주주환원비율이 올라가면 국내증시의 멀티플이나 기업가치를 해외에서 재평가할 수 있는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업종 중에서는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은 저평가 주식이나 자산주 테마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익명을 요구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2016~2017년 국정농단 사태로 삼성그룹의 경영승계가 이슈가 되면서 상법개정 논의가 나왔다"며 "당시 지주업종이 덕분에 탄력을 받았다"고 밝혔다.
B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는 "현금이나 자산을 주주환원에 활용하지 못한 곳들은 펀더멘탈 대비 저평가 되어있다"며 "자기자본이익률(ROE)이 낮은 주식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상법 뿐 아니라 배당소득 분리과세와 상속세 완화 등 세법 개정도 같이 논의될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기업과 투자자가 직접 혜택을 실감할 수 있는 당근책도 동시에 집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앞서 정부는 상속세 최고세율을 50%에서 40%로 낮추고 최대주주 상속, 증여재산에 대해 20% 할증 평가하는 제도를 폐지하는 상속세 개정안을 추진했다. 아울러 밸류업 우수기업에 투자할 경우 배당소득에 대해 분리과세해주는 소득세법 개정안도 발의했지만, 이 법안들은 모두 국회 문턱을 넘지못하고 무산됐다.
A 운용사 대표는 "상법 개정이 '채찍'이라면 상속세 완화는 '당근'에 해당한다"며 "배당을 많이 주는 회사에 투자해 직접 받는 인센티브가 있다면 훨씬 더 투자가 빠르게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C 자산운용사 대표는 "상법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부동산, 주식시장을 아우르는 세법을 전반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승계가 원활히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고 투자자 입장에선 주식을 오래 보유할 수록 저율로 과세하는 구조를 짜 장기투자를 유인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