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약가인하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어 의약품 관세정책이 완화되거나, 철회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의약품에 관세를 부과하면 약가가 오를 뿐만 아니라 의약품 공급 불안정성을 키워 환자 접근성이 떨어질 수 있어서다. 약가인하 정책과 배치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아울러 약가인하 정책으로 고가 브랜드 의약품에 대응할 수 있는 복제약 사용을 확대할 수 있어 국내 기업들이 반사 이익을 거둘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약가인하 시동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현지시간 15일 자국민이 부담하는 처방약 가격을 낮추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65세 이상 고령자와 장애인 등이 가입한 공공의료보험인 메디케어에서 보장하는 약물 가격을 낮추는 게 골자다.
이번 행정명령에 담긴 약가인하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정부가 제약사와 협상을 통해 약가를 직접 낮추고, 시장경쟁을 촉진해 가격 인하를 간접적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는 시장경쟁을 촉진하는 방법 중 하나로 바이오시밀러(생물의약품 복제약) 접근성 개선을 제시했다. 셀트리온, 삼성바이오에피스 등 미국에 바이오시밀러를 판매하는 국내 제약바이오기업의 수혜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국내 바이오시밀러 개발사 관계자는 "바이든 행정부 때부터 약가 인하 정책이 일관되게 나오고 있다"며 "이러한 흐름은 국내 바이오시밀러 업계에 분명 긍정적인 소식"이라고 말했다.
실제 바이오시밀러는 2015년 미국에 출시된 이후 막대한 의료비 절감효과를 내고 있다. 미국 의약품접근성협회(AAM)에 따르면 지난 2023년 한 해 동안 바이오시밀러는 총 124억달러(17조6400억원)의 의료비 절감효과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이후 누적 절감비용은 360억달러(51조2000억원)에 달한다.
트럼프는 이날 약가인하로 인한 제약업계의 반발을 의식해 유화책도 함께 제시했다. 메디케어에서 보장하는 저분자화합물(케미컬의약품)의 약가협상 시기를 생물의약품과 같이 승인 이후 9년에서 13년으로 늘린 것이다. 미국제약협회(PhRMA)는 그간 저분자화합물의 약가협상 시기가 짧은 것을 '알약 페널티(불이익)'라고 부르며 제도 개선을 요구한 바 있다.
의약품 관세정책과 충돌
트럼프 행정부가 약가인하 정책 기조를 이어가면서 의약품 관세정책을 시행할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의약품 관세는 의약품의 가격인상을 부추기고 공급 안정성을 해쳐 환자들의 의료 접근성을 저해할 수 있어서다. 약가인하라는 정책 방향성과 상충한 결과를 빚을 수 있다는 의미다.
트럼프는 첫 번째 대통령 재임 시절부터 약가인하를 정책 우선순위에 두고 이를 밀어붙인 이력이 있다. 이 과정에서 제약업계와 날 선 갈등을 겪기도 했다.
지난 2020년 트럼프는 미국이 일부 고가 의약품에 대해 다른 나라와 비교해 가장 낮은 가격을 내는 내용의 '최혜국 약가 모델'을 도입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에 글로벌 제약사들이 반발했고 이들이 제기한 가처분 소송이 법원에서 인용되며 시행이 중단됐다.
김혁중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트럼프의 공약집 역할을 했던 '아젠다 47'의 전체 47개 의제 중 무려 3개 의제가 제약바이오산업에 집중하고 있다"며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제약바이오 정책은 1기 행정부 말의 주요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현재 트럼프는 제조업 부흥을 위해 대대적인 관세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의약품 산업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2월 일라이릴리, 머크 등 글로벌 제약사 CEO(최고경영인)을 백악관에 불러 미국에서 의약품을 생산할 것을 촉구했다. 트럼프는 이달 2일 발표한 상호관세 대상에서 의약품을 제외했지만 얼마 뒤 관세부과 의사를 다시 밝혔다.
하지만 의약품 관세정책은 약물 가격이 오르고 공급 불안정성이 커지는 등 약가인하 정책과 상충하는 문제를 일으킬 위험을 안고 있다. 실제 '저렴한 약을 위한 환자들'과 같은 미국 환자 옹호 단체는 이런 이유에서 의약품 관세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고 있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는 '제조업 부활'과 '의약품 가격 인하' 중 더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는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백인 노동자층에 주로 호소하는 제조업 부흥 정책과 달리 약가인하는 전체 유권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파급력이 더 큰 편이다. 이런 배경에 트럼프가 약가인하와 함께 의약품 관세정책을 시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그간 중국, 인도 등에서 저가로 원료의약품을 도입했는데 그게 끊기면 당장 가격상승과 필수의약품 수급 불안정이 예상된다"며 "수년간의 유예기간을 준다고 해도 이런 충격을 모두 피하긴 어렵다. 의약품 관세가 실현하기 어렵다고 보는 이유"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