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적완화는 왜 폐기되었는가

  • 2013.06.24(월) 11:20


1. 지난 17, 그러니까 지난주 월요일이었다. 전세계 금융시장을 뒤집어 놓은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바로 전날이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인터뷰가 텔레비전 전파를 탔다.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의 연임 가능성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 글쎄요, 제 생각에 벤 버냉키는 뛰어나게 일을 해왔습니다. FBI 국장 밥 뮬러와 좀 비슷해요. 본인이 원했던 것보다, 혹은 애초에 여겨졌던 것보다는 더 오래 그 자리에 있었어요."

"애초에 여겨졌던 것보다는 더 오래(longer than he was supposed to)"라는 표현에서 듣는 이들의 귀가 쫑긋 세워졌을 것이다. 오바마 발언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하기로 하고...

2. 그 방송이 나가고 하루 반쯤 뒤, 버냉키 의장은 이틀간의 FOMC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내년 상반기"라고 양적완화 정책의 종료 일자를 못박았다. 전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을 쳤다. 얼마 전에 했던 자신의 말은 폐기됐다. 불과 4주 전 그는 의회 청문회에서 "QE를 줄이기 시작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자동적이고 기계적으로 종료를 향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버냉키는 왜 말을 바꾼 것일까. 실마리는 이틀 뒤에 나온 제임스 불라드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총재의 성명서에 들어 있었다. 불라드 총재는 이번 FOMC에서 "지속적인 부양"을 요구하면서 반대표를 던진 인물이다.

"위원회(FOMC)가 버냉키 의장으로 하여금 QE 축소 및 종료와 관련한 시간표를 발표하도록 결정했다."

세계를 뒤흔든 버냉키 의장의 이번 기자회견 내용은 FOMC의 주문사항이었던 셈이다. 버냉키 본인이 동의했든 동의하지 않았든, 위원회의 다수 의견이 그 쪽으로 돌아서버린 것이다.

3. 무엇이 FOMC의 다수를 돌아서게 만들었을까. 버냉키 의장은 '경제와 고용회복세가 빨라지고 불확실성이 줄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여러 가지 정황은 다른 쪽을 가리키고 있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QE의 효과는 제한적이며 점점 줄어드는 반면에 부작용은 갈 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을 위원회가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9월 연준이 '무제한 양적완화'를 단행한 뒤로 미국의 실업률은 떨어졌다. 하지만, 이는 주로 일자리 구하기에 지친 실업자들이 아예 고용시장을 떠나버린 영향이 컸다. 미국 고용상황의 건강성을 가장 광범위하게 보여주는 '취업률(전체 노동가능인구 중에서 취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제자리 걸음을 했다.

버냉키 의장은 집값과 주가를 띄우면 소비와 건축이 살아나고 그래서 고용도 증가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 효과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집값과 주가 뿐 아니라 온갖 자산가격들이 부풀어 오르고, 초단기로 자금을 빌려서 장기 고수익으로 운용하는 위험투자들이 만발했다. 세계 최대의 채권펀드 핌코를 운용하는 빌 그로스 같은 사람은 '초저금리가 오히려 성장을 저해하고 있다'고까지 지적했다.

4. 미국의 통화부양 정책은 왜 실물경제를 끌어 올리지 못했을까. 자산가격의 상승은 왜 소비와 투자와 고용을 성장시키지 못 했을까. 화폐금융론 교과서의 가르침은 신기루였단 말인가.

통화정책과 실물경제의 연결고리가 단절된 것은 미국의 구조적인 문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기원은 약 3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먼저 미국의 분배구조. 지난 196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상승하던 미국의 노동소득 분배율은 1980년대초 들어 다시 빠른 속도로 떨어져 이제 사상 최저수준이 됐다. 대신 기업에게 돌아가는 몫은 빠른 속도로 높아졌다. '주식회사 미국'이 벌어들인 돈이 직원보다는 주주들에게 갈수록 더 많이 배분되는 추세가 심화돼 온 것이다.

※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단지 정치적 제도적 문제 뿐 아니라 다양한 기술적, 경제사적 요인들도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수십 년 이어져 온 소득의 불균형은 부(, 보유자산 규모)의 격차로 귀결된다. 그리고 자산이 중산서민들에게 광범위하게 분포되지 않고 소수의 계층들에게만 집중된 상황에서는 자산가격을 끌어 올려봐야 소비와 투자는 그다지 증가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원래부터 잉여소득이 많기 때문에 자산소득이 증가한다고 해서 돈을 더 쓰지는 않기 때문이다.

2)중산 서민들의 지갑에 쓸 돈이 없다는 사실은 기업들에게도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수요가 늘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기업들의 가장 상식적인 대응은 투자를 자제하는 것이다. 설비와 고용과 생산을 늘려봐야 팔린다는 보장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기업들은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종전과는 '전혀' 다른 투자행태를 보여왔다. 아래 그래프에서 보듯이, 미국의 기업들은 이익이 빠른 속도로 계속 증가했지만 투자는 그렇게 늘리지 않았다. 과거에는 벌어들인 돈보다 몇 배나 더 많은 투자를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익 범위 안에서만 투자를 하는 소극적인 태도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기업들은 초과 이익을 주주들에게 배당으로 더 많이 나눠줬다. 투자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회사에 쌓아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노동소득(근로자)이 기업이익(주주)으로 이전되는 악순환을 낳았다.


3)이러한 거대한 구조변화 뒤에 제공된 초저금리 환경은 기업들에게 '실물'보다는 '금융'에 주력하도록 유인했다. 빚을 내서 배당을 늘리고 자사주를 매입함으로써 주가를 끌어 올리는데 열중한 것이다. 상당수의 상장기업들이 주로 '주가'로써 CEO 성과를 평가하는 증권 자본주의 시대에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CEO들의 이 같은 행태는 매우 상식적인 것이기도 했다. 아래 지표를 보자. 우리가 CEO라면 빚을 내서 자산(설비)을 늘리겠는가 자사주를 사겠는가. 저금리는 부채를 늘려 자본을 소각하도록 유인했을 뿐 투자를 자극하지는 못한 것이다.


5. 지난 18, 그러니까 아마 오바마 대통령의 인터뷰 방송이 전파를 탄 지 몇 시간 안됐을 시각이었을 것이다. 중국의 국가수반도 귀를 쫑긋 세울만한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시진핑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의 말이다.

"당원들은 (1949년 이전) 혁명기 때 수행했던 대중노선을 받아 들여야 한다. 당과 정부의 많은 관리들은 여전히 인민들과 괴리돼 있다. 인민들의 지지를 잃느냐 얻느냐는 당의 존립 문제다. 당은 인민들에게 헌신하고 역사적 진보를 인민들에게서 구할 때만이 유지될 수 있다."

중국의 은행간 단기자금 시장이 극도의 경색에 빠져 있다. 금리가 폭등하는데도 돈을 구하기가 어렵다. 인민은행이 돈줄을 바짝 조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도성장을 지원해온 것으로 여겨졌던, 하지만 적어도 올해 들어서는 실물경제와 괴리돼 오로지 자산거품만 야기하고 있는 그림자 금융을 손보는 작업이 중국에서 진행 중이다.

당의 하부기관인 인민은행의 강경책은 시진핑 주석의 '대중노선' 선언과 오버랩된다. 인민(실물)과 괴리된 금융정책과의 결별을 개시한 것이다.

이는 다시 미국 연준의 양적완화 정책 폐기작업과도 오버랩되며,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과도 맞물린다. "버냉키는 원래 벌써 그만뒀을 것으로 여겨졌던 사람"이란 말은 바로 이 뜻이었을까.

"버냉키 연준 의장이 쓴 통화부양책이라는게 월가의 뱅커들 배만 불려주고 서민들에게는 별로 돌아간 게 없는 걸 안다. 그 사람은 밥 뮬러 FBI 국장과 마찬가지로 부시 정권 때 임명된 사람이다. 버냉키는 공화당원 아니냐. 그래서 그 사람 이제 집에 보내려고 한다."

그렇게 확장해석 해 본다면, 오바마 발언은 버냉키와의 '정치적 절연(絶緣)'이자 '대중노선 선언'이라고 볼 만하다. 그리고 "인민들과 괴리된" 양적완화 정책은 폐기됐다.

6.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07년 대통령 경선에 나섰을 때는 '줄푸세'를 공약으로 내세웠었다.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겠다는 약속이었다. 이는 지난 1980년대초 미국 레이건과 영국 대처 정권의 근간을 이룬 자유주의 정치이념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선거를 앞두고는 당의 이름을 바꾸고, 보수정당의 상징인 파란색 로고를 버렸다. 빨간색 로고를 선택한 뒤로 박근혜 후보는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우리나라 보수당의 대전환과 미국, 중국의 '대중노선'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어렵다. 지난 1980년대 이후로 진행돼 온 불균형 성장의 누적된 모순이 정치환경을 대대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는 그 모순의 경제금융적 폭발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대대적인 통화부양책은 모순을 더욱 심화시켰고, 이제는 정치적 폭발, 질적전환의 목전에 도달한 것이다. 촉이 민감한 정치인들은 그래서 그 진동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7. '대중노선'으로의 전환은 경제정책에도 작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경기부양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환의 과정을 완충할 더욱 적극적인 부양을 요구할 수 있다. 다만, 그 수단은 더 이상 화폐정책이 아닐 것이다. 적극적인 재정지출이 화폐정책을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화폐는 오로지 이윤이 더 높은 곳으로만 움직이지만, 재정은 의도에 따라 방향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세정책에도 큰 변화를 의미한다. 재정을 늘릴 돈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불균형을 시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비자금' 색출 작업은 신호탄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한 대전환 과정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강력한 정치적 저항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전환이 가능할 지 여부는 예단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큰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 뿐이다. 그 변화는, 일부에게는 '몰수'라고도 여겨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시대는 '금융억압에서 금융몰수'로 옮겨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재정이 금융을 대체하는 새 시대는 다시금 '금융억압'을 필요로 한다. 저금리 정책의 지원이 없는 재정의 확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세상은 전환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몰수가 융합, 증폭된 ' 과잉'으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폴 크루그먼 교수가 요구하는 것처럼.

* 금융억압이란 빚 많은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금리를 내려 저축자에게 손해를 끼치는 정책을 말한다. 빌 그로스가 말한 "지난 30년간의 채권 강세장"이란 바로 금융억압의 시대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강세장이 지난 429일부로 종료됐다고 한 빌 그로스의 선언은 '금융몰수 시대의 개막'을 뜻한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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