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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창출 정책의 허구

  • 2013.08.05(월) 08:39

거의 모든 면에서 극과 극으로 비쳐졌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대통령 선거전에서 "7% 경제성장률"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두 대통령이 당장 7%의 경제성장률을 추진했었다면 부작용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경상수지 적자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빚더미에 앉았을 것이다. 우리 경제의 잠재 능력이 연간 3~4% 이상의 성장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아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대통령은 잠재능력을 확대하는데 정책의 초점을 뒀다. 두 대통령의 공약은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7% 잠재성장률"이었다.

 

한 경제의 잠재 성장능력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자본(설비), 노동(인구), 생산성(기술)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동'에 초점을 맞췄다. 당장 출산율을 높여서 인구를 늘리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있는 인구를 노동시장으로 최대한 끌어내겠다는 계획이었다. 타깃은 여성 노동력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본'에 무게를 뒀다. 기업들이 투자를 더 많이 하도록 유도하면 잠재성장률이 높아지지 않겠느냐는 발상이었다. 그래서 법인세를 내리고 규제를 완화하는데 높은 비중을 뒀다.

 

다시 평가해 본다면, 노 전 대통령의 고성장 정책은 반(反)노동적이었다. 그리고 이 전 대통령의 그것은 친(親)기득권적이었다.

 

참여정부의 7%는 왜 반(反)노동적이었던가. 여성 노동력을 고용시장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고 치자. 그럼 노동의 가격, 즉 임금은 어떻게 바뀌겠는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당연히 하락한다. 혼자 벌어서는 가정을 꾸려갈 수 없는 환경이 고착된다. 물론 노동에 대한 수요도 함께 증가하면 임금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수요는 대체 어디에서 나올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 없었다.

 

따라서 이 정책을 성공시키려면 먼저 노동자의 생활비용을 낮추는 정책이 선행돼야 한다. 그 중에서 핵심은 주거비다. 그러나 정책은 거꾸로 갔다. 이 정책의 효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거비가 너무 올라버려서 홑벌이 가정은 먹고 살기가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수 많은 여성 노동력이 시장에 끌려 나왔다.

 

이명박 정부의 7%는 왜 친(親)기득권적이었던가. 시장에 이미 진입해 있는 기업들에게 혜택을 부여하는데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시장의 독과점 구조는 더욱 심화된다. 기득권 기업의 경쟁우위가 확대돼 신규 진입자의 도전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창조적 기업가 정신이 억압되고 경쟁이 저하되며 퇴출은 지연된다. 물가가 오르고 실질수요는 위축되며 생산성은 하락해 잠재성장률이 낮아진다.

 

이명박 정부가 흉내 내고 싶었던 이른바 '공급중시 경제학'은 경쟁촉진을 통한 생산성 증대와 물가안정이 요체다. 정부지출 축소를 통한 이자율 안정도 필수적이다. 이 때 감세는 신규진입 기업과 저소득 노동자에 집중돼야 한다. 그래야 잠재성장력을 구성하는 자본, 노동, 생산성 모두가 향상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정반대로 갔다.

 

박근혜 대통령도 새 일자리 정책을 내놨다. 전 정부와는 여러 가지 차별적인 내용들을 담았지만, "고용률을 70%로 끌어 올린다"는 최종 목표를 보면 본질적으로는 같은 부류다. 노동가능인구 열명 중에 일곱 명이 일자리를 갖게 되면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행복해졌다고 느낄까?

 

[자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우리 경제의 노동수요에 변함이 없는 상태에서 고용률을 70%로 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일자리 나누기가 필수적이다. 사실 지금 일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취업자들의 연 평균 근로시간은 2090시간으로 조사대상 37개국 가운데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길었다. 일자리 나누기의 여지와 필요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일자리를 나누면 소득은 하락할 수 밖에 없다. 누가 자신의 밥그릇을 나누겠다고 선뜻 나서겠는가? 이 정책 역시도 선행과제는 노동자의 생활비용을 낮추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질문에 먼저 답을 낼 필요가 있다. 경제활동참가율과 고용률이 높을수록 좋은 경제인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양질의 일자리에서 더 많은 돈을 번다면 경제적으로 풍요로울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경제는 전세계 모든 정부가 꿈꾸는 이상일 뿐이다. 수요는 그대로라는 문제가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현실화된다고 해서 이것이 반드시 건강한 사회를 의미한다는 보장은 없다. 부모가 모두 일자리로 나감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 비용은 양육, 교육비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건강한 후세대를 길러내는 사회적 기능으로서 '가족'의 가치가 정당하게 재평가돼야 한다.

 

바람직하기로는, '육아 부담이 없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보다는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육아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더 건강하지 않을까. 이런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결국 똑 같은 전제가 필요하다. 생활비용의 하향안정이다. 부모가 둘 다 경제활동에 나설 지 여부는 이런 전제가 실현된 다음에 각 개인과 가족이 자유롭게 선택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갈수록 ‘부모가 될 것인지’ 여부를 선택할 자유조차 상실해 가고 있다. 우리가 지금 풀어야 할 숙제는 일자리 창출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www.globalmonito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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