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에는 모두 일곱 쌍의 갈비가 있어 닭의 폐와 심장을 보호한다. 닭갈비 살은 닭이 숨을 쉴 때 갈비가 움직이도록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갈비와 갈비 사이에 있는 근육이다.
닭갈비는 이 근육을 먹는 것인데 닭백숙이나 통닭을 먹을 때 혹시 갈비를 뜯어(?) 본 경험이 있겠지만 정말 먹을 것이 없는 부위다. 그래도 혹시, 춘천 닭갈비는 푸짐하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유심히 살펴볼 것이 지금의 춘천 닭갈비에는 갈비가 없다.
한자로 계륵(鷄肋)이라고 하는 닭갈비가 유명한 것은 삼국지 때문이다. 소설에서 조조는 전략적 요충지인 한중 땅을 놓고 유비와 전투를 벌인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더 이상 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후퇴도 쉽지 않은 난감한 심정을 조조는 계륵이라고 표현했다.
행군주부 양수가 조조가 암호를 계륵으로 정했다는 말을 듣고, 후퇴 명령이 내려지기도 전에 서둘러 짐을 꾸려 철수 준비를 했다. 먹자니 먹을 것이 없고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심정을 무심코 내뱉은 말이니 곧 철수명령이 떨어질 것이라는 양수의 설명에 다른 장수들도 모두 짐을 꾸렸다.
이 모습을 본 조조가 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며 양수의 목을 베어 처형한다. 삼국지의 내용인데 소설에서 조조는 똑똑하고 재주 많은 양수를 질투하고 속마음을 들켰다고 유능한 부하를 처형한 속 좁은 지도자로 나온다. 삼국지의 작가 나관중은 닭갈비 이야기를 통해서 조조의 난폭함과 간교함을 강조했다.
계륵의 이야기는 과연 사실일까? 조조가 실제로 그렇게 속 좁고 형편없는 지도자였다면 어떻게 유비와 손권을 물리치고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조조가 양수를 죽인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닭갈비, 즉 계륵이라는 말을 듣고 양수가 조조의 심중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진수(陳壽)가 쓴 역사서 『삼국지』의 주석에 "왕이 계륵이라는 암호를 내리자 관속들이 그 뜻을 몰랐는데 주부인 양수만이 스스로 장비를 꾸렸다. 이유를 묻자 양수가 '무릇 닭갈비라는 것이 버리기에는 아깝지만 먹기에도 별 소득이 없으니 한중 땅에 비유한 것이다. 왕의 뜻이 돌아가려는 것이다'라고 했다. 5월에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갔다"고 나온다.
겉보기에는 소설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역사책에서 밝히는 내용은 다르다. 조조가 양수를 죽인 이유는 후계구도를 굳게 다지기 위한 포석이었다.
조조는 첫째 아들 조비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런데 셋째 아들 조식이 형의 태자 자리를 넘봤고 이런 조식에게 여러 차례 지혜를 빌려 준 사람이 똑똑하다고 소문난 양수였다. 게다가 양수는 손꼽히는 명문가 출신에, 조조의 견제세력인 원술과 인척관계였다. 때문에 자신이 죽은 후 양수가 조식을 도와 태자 조비에게 반기를 들 경우 화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후계자인 장남 조비의 권력을 확실히 다져놓아야겠는데 그렇다고 셋째 아들 조식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신 조식의 세력기반이 될 수 있으며, 전략가이자 참모였던 양수를 '닭갈비'를 핑계로 제거한 것이다.
조조는 조심성이 많은 인물이었다. 군주는 늘 경계하지 않으면 그동안 쌓아놓은 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때문에 닭갈비를 핑계 삼아 사후 있을 지도 모를 분쟁을 미연에 막았던 것이다. 조조는 속 좁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속 깊은 인물이었기에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