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비용은 사람들로 하여금 합리적 경제행위를 유도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비용보다는 높은 편익을 내는 선택을 하여야 경제적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저축과 투자, 생산과 소비를 선택하게 하는 대표적인 기회비용은 금리가 된다.
살면서 그냥 지나치거나 무시하기 쉬운 기회비용은 재화나 용역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제적 동물이 결정한 「선택」의 결과, 포기하여야 하는 「다른 선택」의 가치를 의미한다. 예컨대 만원 밖에 없는 주부가 그 돈으로 사과를 살까 아니면 삼겹살을 살까 고민하다가 사과를 샀다면, 사과를 사기위하여 포기한 삼겹살의 가치가 바로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사과 대신 삼겹살을 먹는다고 가정할 때, 가족들이 느끼게 될 미실현 만족감이 사과에 대한 기회비용이다.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기회비용의 개념은 덜 중요해진다. 부족함이 없는 유토피아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수요를 다 충족할 수 있어서, 포기하거나 희생해야 할 기회나 대안이 있을 필요가 없다. 땅이 넓고 예산이 넉넉하다면, 마을사람들이 모여 저수지를 팔까, 교실을 지을까, 경로당을 세울까 고민할 것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이것저것 다 하면 된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수요를 모두 충족시킬 수 없다.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 그리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여야 한다. 당장 먹고 살기에 급급하다면 우선적으로 저수지를 파서 논에 물을 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생계가 유지된다면, 자녀들의 미래를 위하여 교실을 짓는 일이 미래지향적 선택이 될 것이다.
기회비용의 크기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무엇을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에 따라 사뭇 달라진다. 당장 배가 고프더라도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서 교실을 먼저 지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아직까지는 배가 덜 부르니 더 많은 쌀 생산을 위하여 저수지를 먼저 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효자마을에서는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의 복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 할 것이다.
녹지가 주는 쾌적함을 선호하느냐 아니면 녹지에 공장을 지을 것인가의 선택도 기회비용을 어떻게 산출하느냐에 달려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와 진보의 차이 그리고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차이도 기회비용 산정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기회비용의 최대공약수를 찾는 조정과 합의가 민주적으로 합리적으로 진행될수록 그 사회의 갈등과 마찰은 줄어든다. 기회비용에 관한 의사결정이 다양한 가치관에 따라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민주사회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기회비용을 조정하고 결정하는 일이 힘 있는 몇몇 사람 멋대로 행해지면 권위주의 사회, 독재국가가 된다. 예컨대 고령사회를 맞이하여 의료시설을 확장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힘센 사람이 자기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막무가내 저수지를 파도록 강요하는 사회를 어찌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러한 환경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조그만 편익이나 욕망 또는 공명심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비용의 대가를 크게 치르도록 강요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어 성장도 발전도 더디어질 수도 있다. 쉬운 예로 사람들은 굶주리는데 빵 생산을 외면하고 미사일을 만들겠다고 고집하는 나라에서, 미사일의 기회비용은 수 만 명 내지 수십 만 명의 목숨만큼 커진다.
기회비용은 기회주의자들에게는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줄어들었다 한다. 그들은 교실과 경로당을 먼저 지어야 한다고 논리를 펴다가도 역학구조가 달라지면 돌연 저수지를 파야 한다고 억지 논리를 편다. 물론 그들이 왔다 갔다 하며 벌이는 견강부회 논리의 배경이 공익이 아닌 사적이해(private interest)에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경전철이나 「4대강 사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제적 비효율과 사회적 갈등은 대부분 기회비용(機會費用)을 왜곡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선택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그들이 저지른 「잘못된 선택」의 후유증을 선량한 시민들이 대신하여 감당하여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