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은행 회장 홍기택입니다."
어제(28일) 산업은행 기자간담회에서 홍 회장은 이렇게 본인을 소개했습니다. 그럼 행장은 누구냐고요? 이상합니다. 산업은행엔 행장이 없다네요.
어떻게 된 사연일까요. 산업은행은 당당히 얘기합니다. 산업은행법(이하 산은법)에 그렇게 나와 있다고. 실제로 지난해 5월 바뀐 산은법엔 산은의 임원 구성을 회장, 전무이사, 이사로 규정했습니다.
바뀐 법에 따라 작년 12월 말 산은지주, 산업은행, 정책금융공사를 통합해 산업은행이 출범했습니다. 통합 산은이 출범하기 전까지 홍기택 회장은 산은지주 회장과 산업은행장을 겸임했기 때문에 '회장님'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산업은행으로 통합하려다 보니 이 호칭이 문제가 된 겁니다. 엄밀히 따지면 산업은행이니 은행장이 맞습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대로 법 개정 과정에서 산은 CEO를 행장이 아닌 회장으로 하기로 한 것인데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행장은 격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대부분 시중은행은 금융지주회사 체제여서 회장을 두고 있습니다. KB금융이나 신한금융, 하나금융, 지금은 은행과 통합했지만, 당시 우리금융지주 등 모두 회장이 최고경영자로 돼 있지요. 그러다 보니 은행장은 격이 낮아 보인다는 건데요.
산업은행은 다른 시중은행들과 다르게 정책금융기관이고 국내 금융시장에서의 위상이나 역할을 보면 은행장 그 이상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그 수장을 대통령이 임명하니 급이 다르다는 얘깁니다. 금융위원회와 산업은행의 설명이 그렇습니다.
총재라고 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법 개정 당시 일각에서는 총재라고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산업은행이 강력히 바라던 바였을 테지요. 하지만 과거 권위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은행장으로 바뀌었던 것을 되살리기엔 부담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뭐라고 했었나요? 금융위 업무보고에서 그는 "은행장이 자신을 총재로 부르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 같다"며 "과거 사회의 뿌리 깊은 권위의식을 버리고 금융산업이 서비스산업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뭐, 기업인 출신인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과거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 방향이 지금도 틀리진 않아 보입니다.
정책금융기관이 하는 일이 뭔가요. 시중은행에서 하기 어려운 대출이든 투자든 정부를 대신해서 해줌으로써 시중은행과 서로 보완하면서 건전한 금융과 경제를 만드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굳이 은행장보다 격이 높아야 할 이유는요. 설마 옛날 옛적 임금님이 가난한 백성을 위해 구휼미 내리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아닐 테지요.
정책금융기관을 자꾸 얘기하는데 산업은행 등의 국책은행은 국가와 같은 신용등급을 부여받습니다. 이 등급을 기반으로 외국에서 싸게 자금을 빌려 오는데요.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줍니다. 이 말은 곧 국민 세금으로 보장해준다는 건데요. 더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대기업 구조조정 등을 주도하면서 굴지의 대기업 회장님들을 상대로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권위나 위상이란 게 회장님이든 행장님이든 그 호칭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테지요. 누가 봐도 산업은행장인 것을 굳이 회장으로 한 것은 결국 구시대적인 발상이거나 권위의식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이 되지 않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