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도쿄=박수익 김보라 이돈섭 기자] "단기성과 위주의 무리한 경영과 위험관리시스템의 부실이 위기의 주원인이었다. 그러나 이들 회사의 주요주주인 기관투자자들도 이사회와 경영진의 행동을 묵인하면서 그들의 잘못된 결정에 일조했다. 대형 기관투자자조차 자신들이 투자한 회사의 문제에 대처하는데 게을렀다. 그들은 경영진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찬성만 했다."
2009년 발간된 '영국 은행과 금융산업의 지배구조 검토보고서'(A review of corporate governance in UK banks and other financial industry entities) 내용이다.
보고서 발간 1년 전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시름했다. 위기의 원인과 재발방지 대책을 제시한 이 보고서는 작성자 데이비드 워커 전 모건스탠리 회장의 이름을 따 '워커보고서'라고도 부른다.
워커보고서의 주된 내용은 영국 금융회사의 지배구조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지만 금융회사의 주주 특히 기관투자자(Institutional investor)의 소극적 태도를 지적하고 스튜어드십 의무(Duty of stewardship)를 강조했다.
소는 잃었더라도 외양간은 제대로 고쳐보자는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영국에게 축구 외에도 스튜어드십코드 종주국이란 지위를 부여한 이론적 토대가 됐다.
◇ 스튜어드십코드 산실 FRC…책임투자 헤드 UN PRI
영국 통상산업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재무보고위원회(FRC:Financial Reporting Council)는 2010년 7월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스튜어드십코드(The UK Stewardship Code)를 발표했고, 현재까지 278개 기관투자자가 가입했다.
영국 스튜어드십코드는 종주국답게 강한 조항을 가지고 있다. '기관투자자는 적절한 경우 다른 투자자와 공동으로 행동해야한다'는 원칙이다.
한국스튜어드십코드에서는 빠진 이 원칙에 따라 영국 기관투자자들은 2015년 세계적 석유회사 쉘(Shell), 비피(BP)를 상대로 공동 주주제안권을 행사하는 캠페인 'Aiming for A'를 진행했다. 석유회사들은 주주제안을 받아들이고 화석연료와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보고서와 함께 향후 계획을 투자자들과 공유했다.
스튜어드십코드가 단순히 주주이익 향상을 넘어 장기투자의 관점에서 환경(E)·사회(S)·지배구조(G)를 아우르는 책임투자의 영역과 함께 간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영국 스튜어드십코드를 관장하는 데이비드 스타일스 FRC 기업지배구조담당 이사는 "기관투자자 간 연대 조항은 기업에 더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다만 연대의 의미가 기업 경영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주주행동주의와는 다른 개념이고 회사의 경영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영국 런던에는 스튜어드십코드의 산실인 FRC뿐만 아니라 책임투자분야의 ‘글로벌헤드’로 불리는 UN PRI(유엔 책임투자원칙)도 있다. 2006년 당시 UN사무총장이던 코피아난 주도로 만들어진 책임투자 네트워크이다. 전 세계 2035개 기관투자자가 PRI 원칙에 서명하고 책임투자를 위한 활동을 약속하고 있다. 서명기관들의 운용자산을 모두 합치면 80조 달러(한화 약 8경9430조원)에 이른다.
국민연금도 2009년 PRI의 원칙에 서명하고 약 7조원의 자산을 책임투자형펀드에 위탁하고 있다. 다만 그 규모는 국민연금의 전체 운용자산(635조원)의 1% 남짓이다. 국민연금 뿐 아니라 아시아권 국가의 기관투자자들에게 아직 본격적인 책임투자의 길은 멀다. 나단 파비앙 PRI 정책조사담당 이사는 "국민연금은 공적기관이기 때문에 규모와 책임에 비례해 영향력도 클 수밖에 없다"며 "단기적 수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장기적 성장의 관점에서 책임투자를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FRC와 PRI는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최근 방문해 스튜어드십코드와 책임투자에 대한 견해를 청취한 기관이기도 하다.
◇ 日 스튜어드십코드 이끈 GPIF…착한투자 가마쿠라투자신탁
한국에서는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의 첫발을 떼기 전부터 경영참여 범위, 의결권 위탁 문제 등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스튜어드십코드를 먼저 도입한 일본은 어땠을까.
일본 정부는 2013년 6월 국무회의를 열고 일본재흥전략(JAPAN is BACK)의 일환으로 기업의 중장기적인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수탁자 책임원칙을 만들기로 했다. 이후 일본 금융청에 사무국을 둔 전문가검토회가 일본판 스튜어드십코드를 제정했다.
한국에선 스튜어드십코드가 첫 선을 보인 지 2년이 가까워질 시간동안 국민연금이 이렇다할 결론조차 쉽게 내리지 못했지만 일본은 달랐다.
일본판 스튜어드십코드를 이끈 건 공적연금 GPIF(Government Pension Investment Fund)다. 운용자산 1570조원(156조3832억엔)의 세계1위 연기금을 운용하는 GPIF는 일본판 스튜어드십코드가 만들어진 첫해인 2014년 앞장서 도입했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운영 모델로 GPIF가 적합한지는 애매하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자산 중 절반 이상을 직접 운용하는 반면 GPIF는 자국 주식자산을 모두 자산운용사에 위탁하고 주주권도 직접 행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GPIF가 자금을 맡긴 기관투자자들이 수탁자 의무를 다하도록 적극 유도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점이 될 수 있다. GPIF의 자금을 운용하는 기관투자자들은 투자기업과 적극적인 대화를 추진해야 수수료 혜택을 받는다. 또 GPIF가 기관투자자들의 실적을 평가할 때도 스튜어드십코드 관련 활동을 따진다. GPIF는 특히 기관투자자 평가항목 가운데 스튜어드십코드 활동 비중을 최근 15%에서 30%로 두배 높였다.
니시히라 켄야 GPIF 기획국장은 "일본의 스튜어드십코드는 주주와 기업 간의 대화를 통해 기업 가치를 중장기적으로 향상시킨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는 GPIF의 목표와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도쿄 중심부에서 서남쪽으로 약 60km 떨어진 해안도시 가마쿠라시(鎌倉市)에 가마쿠라투자신탁이란 자산운용사가 있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일본사회를 재평가하기 시작한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이 회사의 투자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단순히 수익률을 높여주는 회사가 아닌 고용·기술 등의 측면에서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회사의 주식을 사들여 장기 보유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마쿠라투자신탁은 투자 대상을 찾기 위해 ESG 평가등급 같은 획일적인 기준을 무작정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직접 투자자를 모으고 투자자와 함께 좋은 회사를 찾아 적극적으로 대화한다. 어찌 보면 가마쿠라투자신탁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야말로 스튜어드십코드와 책임투자가 지향하는 궁극의 지향점이 아닐까 싶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는 것은 투자기업과의 적극적 대화, 책임투자 확산이라는 전 세계적인 추세에 따른다는 점 외에도 최근 한국에서 연이어 나타나는 대기업 총수일가의 전횡을 견제하는 합리적 수단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가마타 야스유키 가마쿠라투자신탁 사장은 최근 한국기업의 지배구조 이슈와 관련 "대주주나 전문경영인 누가 경영을 하든 중요한 것은 기업을 사유화하지 않는 것"이라며 "기업은 경영진뿐만 아니라 주주, 직원, 직원의 가족, 거래처 등 기업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즈니스워치는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을 놓고 한국사회가 격론을 벌이던 지난 7월 중순 스튜어드십코드의 종주국 영국, 아시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스튜어드십코드를 운영하고 있는 일본을 방문했다. 그들은 어떠한 이유에서 스튜어드십코드를 먼저 도입하고 사회책임투자를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가. 그 답을 소개한다.